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6월 14일] <1722> 네이즈비 전투


1645년 6월14일 새벽, 런던 북부 네이즈비(Naseby). 왕당파와 의회군이 맞붙었다. 병력 차이 8,000명 대 1만3,500명. 의회군이 훨씬 우세했으나 찰스 1세의 군대는 승리를 자신했다. 귀족과 젠트리의 자제들로 구성된 정예기병대가 진격하면 의회군을 박살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초전은 그랬다. 국왕의 조카인 루퍼트 왕자가 지휘하는 기병대가 의회군의 중앙진영을 휘저었다. 왕당파 군대의 기쁨은 잠시로 그치고 전세는 바로 뒤집혔다. 외회군의 부사령관 올리버 크롬웰 산하의 신형군(New model army) 기병대의 반격으로 왕당파 군대는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의회군은 초반 전투에서 400여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나 찰스 1세의 주력군 1,000명을 죽이고 5,000여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국왕이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까지 찾아냈다. 결국 내전의 주도권도 이 전투로 의회에 넘어가고 영국은 국왕의 참수형과 공화정, 왕정복고라는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네이즈비 전투의 향방을 결정한 신형군의 주력은 중산층. 크롬웰은 말을 탈 수 있는 정도의 자영농 자제들에게 양질의 무장과 장비를 제공하고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시켜 귀족 군대를 물리치고 전쟁의 판세까지 바꾸었다. 군제와 의식의 개혁이 없었다면 의회군의 승리와 공화정은 물론 영국의 번영을 이끈 크롬웰의 항해법도 태동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의회군의 탄탄한 경제력이 신형군 편성의 바탕이었음은 물론이다. 네이즈비 전투가 단순한 옛날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비상상황에서도 술과 타성에 빠진 채 허위보고와 기록조작을 일삼았던 우리 군의 모습이 감사원 조사로 드러났다. 비단 군대뿐이랴. 주머니는 비어가는데 문제가 드러나도 반성의 기미가 없던 17세기 영국 왕당파는 우리와 닮은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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