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지휘자들은 자신만의 색깔을 만드는데 골몰한다. 젊은 지휘자 구자범(36)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독일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지휘자로 낙점 받아 국내에서도 이미 스타 지휘자 반열에 오른 구자범이 서울시향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다.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그가 자신의 색채를 분명하게 보여줄 곡목들은 바그너와 슈만, 힌데미트 등 독일 작곡가들 작품. 근대 오페라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낭만주의 작곡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서곡과 슈만의 교향곡 4번, 현대 작곡가 힌데미트의 교향곡 ‘화가 마티스’ 등 협연자가 필요 없는 서곡과 교향곡들로 채워졌다. “슈만은 뼈 속까지 철저하게 낭만적인 인물입니다. 짧은 음표 하나에 긴 크레센도 악상 기호를 달아 놓을 정도로 음 하나 하나에 풍부한 감성 표현을 강조하고 있죠. 그런데 지금까지 연주된 그의 교향곡은 그런 낭만적인 특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것 같아요.” 슈만의 교향곡 4번의 색깔을 그는 ‘로맨틱’으로 잡았다. “물론 슈만 4번 교향곡이 그의 다른 작품보다는 구조적으로 낭만적인 색깔이 적다는 지적도 있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4번 교향곡 2악장을 연주하다 보면 그의 절절한 낭만적 심성에 지휘하는 제 자신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힌데미트의 교향곡 ‘화가 마티스’는 지휘자 구자범 자신이 지금껏 고집해온 삶의 철학과 맥을 통하고 있다. 이 작품 속 화가 마티스는 흔히 알려진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가 아니라 15~16세기에 활동했던 독일 화가 마티스 그뤼네발트. 힌데미트는 마티스의 세 벽화 ‘천사의 합주’‘매장’ ‘성 안토니우스의 시련’을 주제로 화가 마티스란 오페라를 만들었다. 농민 편에 선 주인공들의 행적을 찬양한 이 오페라는 1934년 초연 당시 히틀러의 나치즘에 반하는 정치색 짙은 작품으로 평가돼 진가를 제대로 인정 받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대본과 곡을 쓴 이 오페라에서 실패를 맞본 힌데미트는 1938년에 이를 교향곡으로 수정해 발표했다. “제 삶의 철학은 철저하게 현실 참여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답니다. 이 곡의 원작 오페라 주인공들은 예술이냐 현실 참여냐 갈림길에서 예술을 선택했던 사람들이고 힌데미트의 이 교향곡도 그런 사회 참여 의지가 짙게 배어 있죠. 그런 곡의 역사가 저의 철학적 토대와 일맥 상통하기 때문에 흥분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모른다 해도 이 작품은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들로 가득 차 있어 한번 듣는다면 바로 매료 당하고 말 겁니다.” 이번 공연은 22~25일 예술의전당에 올려지는 국립오페라단의 투란도트 공연에 이어 올 해 그가 국내에서 지휘대에 서는 두 번째 무대. 8월부터 하노버 국립오페란 극장 수석지휘자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올해 국내 연주기회는 더 이상 잡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대학시절 철학과 재학 중에 뮤지컬 무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뮤지컬과 오페라 사이에 굳이 경계선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국내외 무대에서 뮤지컬 작품을 지휘할 생각이다. 바쁜 연주 일정 속에서 틈을 내 조만간 오페라를 작곡할 계획도 품고 있다.(02)3700-6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