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6일] 조·미 수호통상조약


‘朝, 美條約成(조, 미조약성:미국과 조약을 맺다)’ 조선왕조실록 고종편 19권(1882년) 4월6일(양력 5월22일)자의 기록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이 서양과 맺은 첫 근대적 조약이지만 정작 협상 주역은 청나라. 일본 견제용으로 조선ㆍ미국간 국교를 중재한 청은 문구 작성까지 도맡았다. 조약 체결 순간에도 제물포 화도진 앞바다에서는 미국과 청의 군함들이 번갈아가며 축포를 쏘아 올렸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신호탄으로 물밀듯 들어온 열강의 외교사절단 중에서도 고종은 미국인들을 유달리 아꼈다.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 금광이며 철도, 전기회사 부설권 등 알짜 이권을 내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양대인(洋大人)으로 행세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완용 등 친미파도 대거 생겨났다. 고종은 미국을 안보의 버팀목으로도 여겼다. 근거는 조미수호통상조약 1조에 명시된 ‘불공경모(不公輕貌)’ 관련 문구. 제3국으로부터 부당하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뜻의 문구를 조선은 외세침략을 막아줄 바람막이로 믿었지만 미국에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을 뿐이다. 미국은 오히려 철저히 일본 편에 섰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에 동의한 미국은 을사늑약 직후 공관을 가장 먼저 철수시켜 숭미(崇美) 조선을 배신감에 떨게 만들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125주년. 한국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막 맺었다. FTA 자체가 조미조약 같은 ‘불평등 조약’도 아니고 한국의 힘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격랑 한가운데 있다는 점이다. 오욕의 역사를 딛고 일어설지, 아니면 되풀이할지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