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컬럼] 영변의 약산 '진달래'

김인영 금융부장 <a href="mailto:inkim@sed.co.kr">inkim@sed.co.kr</a>

조선 22대 정조가 즉위할 때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할머니(대비)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주변이 정적들로 가득찬 가운데 24세의 어린 임금은 노론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다. 조선 초기 70년 동안 권력에서 밀려나 야당생활을 하던 사림파는 9대 성종 때부터 중앙에 진출, 서서히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몰아낼 때는 단결했지만 일단 권력을 장악하자 곧바로 분파를 형성했다.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져 조선조 후반기는 이른바 사색당파(四色黨派) 싸움으로 날을 지샜다. 조선조 당쟁은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서인은 기호 지방, 동인과 그 갈래인 남인은 영남 유생을 기반으로 했다. 그들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결국 지역주의 패싸움을 했던 것이다. 야당이 된 당파는 자신을 지지하는 임금을 세우려 목숨을 걸었고 집권 정파는 새로운 임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흔들기 일쑤였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소론과 손잡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지만 집권세력인 노론에 밀려 동생인 영조에게 권력을 이양했고 영조를 등에 업은 노론은 소론에 동정적인 사도세자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부쳤다. 정조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노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10년 이상 은인자중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소론은 노론의 탄압으로 지리멸렬했고 남인은 본거지인 영남 지역에 내려가 후학을 양성한다는 명분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다. 정조 12년, 마침내 남인의 본거지인 영남 지역 유생 1만여명이 연명한 상소문을 들고 대궐 앞에 몇 달째 꿇어 시위를 벌였다. 정조는 노론을 타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상소 내용은 사도세자의 복권과 그의 죽음에 대한 인책론이었다. 정조는 영남 유생의 시위를 이용해 경기도 사대부(노론) 세력을 실각시키고 권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조 후반 300년은 당쟁의 역사였다. 정권을 쥔 정당은 상대 당파의 씨를 말리기 위해 수차례 사화(士禍)를 일으켰고 선비들은 백성이 굶든 말든 상관없이 권력에 아부하며 뇌물을 돌려 출셋길을 찾는 데 혈안이었다. 한국의 정당은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ㆍ호남이 갈라졌고 여기에 중부권도 하나의 정당을 형성했다. 야당의 압승으로 끝난 4ㆍ30 보선도 한국의 정당이 지역에 얼마나 강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조가 당쟁으로 인해 망했다는 식민사관을 만들어냈다. 그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 조선 사대부 계급은 당파싸움에 매몰돼 있는 동안에 자본주의가 확산되며 구체제가 몰락하는 국제정세에 눈돌리지 못했고 결국은 국가를 지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정치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 개발을 포기하도록 조이고 있는 와중에 북한은 동해에서 미사일을 발사, 동북아에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일본과 중국은 패권주의를 지향하며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동북아의 지정학직 리스크가 높아지면 금융시장의 불안도 높아지고 이 경우 미약하게 돋아나는 경제회복의 싹도 꺾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학자 구양수는 저서 '붕당론'에서 공도(公道)를 실천하는 모임을 군자당(君子黨), 개인 이익을 도모하는 정당을 소인당(小人黨)이라고 정의했다. 우리 정치인들도 나라가 어려운 시점에 소인배와 같은 패거리주의에서 벗어나 군자의 정도(正道)를 걸을 것을 권하고 싶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