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작가 전수천의 ‘드로잉 열차’ 7박8일 대장정 마감<BR>뉴욕에서 LA까지 5,500㎞횡단하며 白衣정신 그려
| 흰천으로 감싼 15량의 대륙횡단 열차가 미국 서부 모하비사막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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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국가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고 영원한 민족 비전의 선을 그었습니다.”
뉴욕을 지난 14일 출발, 흰천으로 감싼 15량의 열차를 타고 미대륙 5,500km를 내달린 설치미술가 전수천씨(58,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교수)는 지난 21일 오후 9시15분 로스앤젤레스 유니언역에 도착, 7박8일의 대장정을 성공리에 마쳤다. 출발때 하얗던 천 역시 13개주에 10개 도시를 거쳐오면서 검정색에 가깝게 변색됐으나 어디 하나 뜯어지거나 흠 간 것 없이 도착지에 온전하게 발을 내디뎠다.
이날 열차에서 함께 내린 방송인 황인용, 최병학, 소설가 신경숙, 피아니스트 노영심씨 등 60명의 참여관객들도 큰 일을 해냈다는 안도감으로 유니언역에 내렸다.
도착 직후 1개 차량의 흰색 천 위에 검은색 수성페인트를 흠뻑 묻힌 굵은 붓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일필로 그려 나간 전교수는 "열차에 동참했던 여러분도 작품입니다. 붓도 준비돼 있고 물감도 여러색 있습니다. 직접 드로잉 해 주십시요"고 주문했다.
뉴 멕시코 사막 지평선의 황홀한 일몰과 그랜드캐년의 대자연, 모하비사막을 통과한 열차가 야자수나무의 가로수와 고층빌딩이 보이면서 종착역이 가까워졌음을 보여주자 많은 관객들은 “사고없이 도착해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아무때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닌 특별한 체험”이었다고 입을 모은 그들은 전씨 얘기가 끝나자 마자 일제히 붓을 들고 빈 여백에 '해냈다' '대한민국 만세' 등의 글로, 낙서로 드로잉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흰색 천으로 덮은 길이 약 400m의 열차가 작가의 '붓' 역할을 하면서 현대미술의 메카인 뉴욕을 출발, '마천루의 전시장' 시카고, 미국의 정중앙 캔자스주를 지나 미대륙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른 서부 LA에 이르는 미국 대륙을 캔버스 삼아 한민족을 상징하는 기다란 선을 그려낸 것이다. 관객 60명이 타고 온 기차는 붓, 땅은 캔버스. 하얀 기차는 햇살을 반사하며 은빛으로 반짝거리기도 했고 붉은 노을을 담아 빨갛게 물들기도 했으며, 초록이 물든 대자연 숲을 지나면 흰빛을 더욱 빛냈다.
'전스 드로잉' 프로젝트팀은 프로젝트의 다양한 관찰을 위해 동부 중부 서부 등지에서 세차례 헬기 항공촬영을 했으며, 현대자동차 산타페 밴을 이용해 40번 미 대륙 동서하이웨이를 따라가며 열차의 갖은 모습을 촬영했다. 밴에서 본 기차는 햇빛의 강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반사했을 뿐 아니라, 바람에 휘날리는 흰천은 물고기 비늘 같은 이채로움을 만들어냈다. 태양의 황금빛은 어디나 똑 같은 것은 아니다. 농도의 차이는 물론이고 색의 배합도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그 빛들은 가 닿는 곳마다 크고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며 하늘과 땅을 섞이게 하고 열차와 육지의 경계를 없앤다.
전교수는 "흰색은 우리의 정신이며 미 대륙을 달리면서 큰 그림을 그려봤다"며 "이민 100년을 맞은 3년전에도 이루지 못했던 것을 광복 60주년인 올해에 마침내 성공적으로 끝내고 한 획을 그을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미국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른 5,500km 긴 여정은 고행길이었다. 드로잉 일부가 된 탑승객들은 뉴욕에서 기차를 빌려준 '레일 크루즈 아메리카' 본사가 있는 세인트 루이스까지 연착을 수도 없이 하는 열차의 '심술'과 변덕스런 일정에 녹초가 됐다. 결국 4,5일이 지나 '마법과 매혹의 땅'이라 불리는 뉴멕시코주로 접어들어 가든시티나 앨버쿠키시를 들어갈때는 모두가 체념, 3,4시간의 연착에도 '또 늦어'라기 보다 '생각보다 빠르네'라며 포용했다. 5,500km의 시공간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부대끼면서 열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각양각색의 '인간풍경'을 또 다른 작품으로 빚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