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북 정책기조가 변한 것일까. 북핵 6자회담 타결과 관련해 미국의 입장 변화가 감지돼 주목을 끌고 있다. 3년 가까이 협상과 결렬을 반복해온 북핵회담이 극적으로 타결된 데는 한국의 자주적인 외교노력과 의장국인 중국의 절묘한 중재가 한 몫 했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경우든 북핵을 용인하지 않겠다’던 미국의 입장 변화가 깔려 있다.
2단계 4차 북핵 6자회담에서도 일반적인 예상은 미국이 결국은 공동합의문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이 막판에 내놓은 제5차 수정안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 미국은 막판까지 주춤거린 것으로 알려졌다. 19일 오전8시30분에 개최될 예정이었던 전체회의가 3시간 넘게 연기된 것도 미국의 고민 때문이었다는 게 베이징 외교가의 전언이다.
미국의 핵심 고민거리는 경수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 이뤄진 제네바 핵합의의 상징물인 경수로가 포함된 중국의 수정안은 부시 행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핵문제를 망쳐놓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부시 행정부, 특히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는 ‘경수로 수정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장고 끝에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왜 입장을 바꿨을까. 복잡한 국내외 사정이 양보와 타협을 택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미군의 발목이 잡힌 이라크에 막대한 전비를 퍼부어 하리케인 카트리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난에 직면한데다 이란 핵문제까지 불거져 이전과 같은 강경 일변도의 대북정책이 어려워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호전적 기질이 강한 부시 행정부지만 내치 어려움으로 가시적인 외교적 성과물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최근 미국을 방문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부 장관을 만나 북한에도 명분이 필요하다고 설득한 점이 먹혀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반 장관은 당시 “미국측과 유익한 협의를 통해 공감을 이뤘다”며 “핵폐기의 투명성이 보장되고 신뢰가 형성되면 평화적 핵이용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었다. 미국이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프로그램의 폐기, NPT 복귀, IAEA 사찰 재허용’이라는 전제 아래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수용한 이면에는 한미 외교 수장간 합의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도성장 가도를 질주하는 중국과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는 러시아가 동북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상황에서 북핵 문제를 무한정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도 미국으로 하여금 조기 타결을 결심하게 만든 요인으로 해석된다. 이라크와 이란 등 중동 문제에도 골치 아픈 처지에 북한 문제를 놓고 시일을 끌면 끌수록 동북아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북핵협상에서 유연한 양보를 낳은 셈이다.
다만 미국의 유연함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미국의 북한의 핵폐기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북한은 평화적 핵이용권에 고무돼 있어 5차 협상과정에서 의견대립이 일어날 소지가 많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