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3월 18일] 중앙은행의 경쟁력

12세기에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를 세운 헨리2세는 즉위하자 그가 아끼던 옥쇄상서 토머스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다. 그러나 베게트는 국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 지난날 총애하시던 것 이상으로 저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께서는 대주교 입장에서 용납할수 없을 만큼 많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왕과의 갈등 끝에 비극적 최후를 마친 베켓은 타협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범적 사례로 종종 인용된다. 시대흐름 안맞는 독립성 시비 유별나게 독립성이 강조되는 한국은행 새 총재 자리에 김중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가 내정됐다. 한국개발연구원장을 지내고 청와대 비서관과 경제수석, 외교관 등을 거쳤다는 점에서 김 대사는 굳이 분류한다면 이른바 관변학자 출신 관료범주에 든다. 다소 의외라는 반응도 적잖아 보인다. 그러나 청와대가 밝힌 대로 글로벌 감각, 전문성ㆍ개혁성 등의 잣대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흠이라면 그의 경력에 비춰볼 때 독립성 시비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국은행 총재의 자격요건과 관련해 친정부냐 아니냐가 논란거리가 되는 데는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단순화하면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인플레이션과 같은 부작용이 있더라도 성장을 우선시하는 정부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화폐가치 안정이라는 고유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독립성이 확보돼야 하고 이를 위한 일차적 조건으로 친정부적 인사는 적합하지 않다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만물은 기화하듯이 모든 것은 변한다. '인플레이션은 죽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지난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스태그플이션의 사슬에서 벗어나 안정적 성장을 구가하면서 갑자기 중앙은행의 목표가 모호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파생상품을 중심으로 유사통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M2, M3와 같은 전통적 통화량 지표도 쓸모 없어지게 됐다. 자연히 통화론자와 케인지언 간 치열한 논쟁도 한물갔다. 중앙은행으로서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형국이 된 것이다. 미국 FRB가 물가안정이라는 고유 목표보다는 거시경제 전반을 아우르는 금리통화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00년대 들어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9ㆍ11 사태 등이 겹치면서 미국경제가 위태롭게 되자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은행(FRB) 의장은 경제를 살리는 데 정부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현재의 벤 버냉키 의장 역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발행한 국채를 발권력을 동원해 직접 사들임으로써 정부와 중앙은행 간 벽까지 허무는 파격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보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존중돼야 하지만 지나치게 경직된 관점에서 볼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도 든다. 그보다 우리와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국내외 경제환경을 효과적으로 헤쳐나가는 전문성과 유연한 정책구사 능력이다. 경쟁력 있는 중앙은행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 외환위기시에도 그랬지만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정부는 물론 한국은행 역시 한발 앞서 '위기'를 감지하고 소방수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도그마 아닌 정책구사 능력 중요 상황이 이렇다면 정부와 중앙은행 간 관계를 헨리2세와 베게트 대주교의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직 경제위기가 끝난 것도 아니지만 앞으로 출구전략 등 우리경제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많은 현안들에 대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다. 은행 검사권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는 한은법 개정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독립성의 울타리를 높이기보다는 안개처럼 감도는 '남대문출장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경쟁력 있는 한국은행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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