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더블 클릭] 위장취업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가 존재하던 1970~1980년대 말 대학가와 떨어질 수 없는 단어가 학생운동이었다. 상아탑과 낭만 대신 최루탄의 메스꺼움만 가득했던 그 시절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군부 독재에 맞서기 위해 공장 등 노동현장에 뛰어드는 길을 걸었다. 신분을 속이고 하루 종일 생산직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대학생들에게 공안당국은 이런 이름을 붙였다. ‘위장취업자.’


△1980년 초까지 위장취업은 해외 파견과 맥을 같이 했다. 1963년 12월21일 123명으로 시작된 서독으로의 광부 수출은 1976년에 누적 규모로 7,800명까지 달했다. 원래는 경험 있는 광부가 가야 했지만 실제로는 돈을 벌기 위해 학력을 속인 대학생과 중퇴자가 상당수였다.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일부러 연탄재와 석탄더미에 손을 문지르는 일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해외 취업이민을 위해 신분을 위장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 사회 문제로 대두하기도 했고 1980년대 초 불기 시작한 중동 건설 붐에도 취직 못한 대학생들의 지원이 줄을 이었다.

관련기사



△1980년대 ‘서울의 봄’의 무산과 학생운동의 확산은 위장취업의 성격을 일거에 바꿔버렸다. 이전까지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이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연계를 위한 사회참여형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했다. 1985년 공장에 취업한 대학생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가져왔던 대우자동차 파업 사태와 군사정권의 부도덕성을 사회에 알린 부천 성고문 사건이 대표적이다. 민간 정부의 탄생과 구소련의 몰락 이후만을 경험한 지금 대학생에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일 터이지만….

△한 공기업에서 고졸채용 전형으로 30명을 뽑고 난 후 확인해봤더니 이 중 27명이 대학 졸업자였다고 한다.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현실에 대학생들이 학력을 낮춰 대거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사회 참여의 수단이 됐던 위장취업이 다시 생계형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래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실업률 7.9%, 비공식 80만명인 청년 백수 시대에 접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개발연도부터 지금까지 청년들을 옭아매는 위장취업의 굴레를 벗을 날은 과연 언제일까. /송영규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