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3월27일] 유리 가가린

세번 싸워 한번 졌는데 떨어지고, 두번 진 놈은 올라가고…. 미소의 우주개발 경쟁사가 꼭 야구짝이다. 1957년 10월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을 띄우자 ‘스푸트니크 쇼크’에 빠진 미국은 추격을 서둘렀으나 3년반 만에 또 졌다. 1961년 4월, 27살의 유리 가가린(Yurii Gagarin)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48분 동안 인간 최초로 지구를 돌아 미국에 충격을 안겨준 것. 가가린은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평범한 시골 목수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형제를 2차대전에서 잃고 제철공이 되려다 비행학교에 입교, 전투기 조종사가 된 후 3,000대1의 경쟁 끝에 우주비행사의 꿈을 이룬 가가린 스토리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안성맞춤이었다. 가가린이 아내와 두 딸을 동반하고 세계 50여개국을 방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우주비행사로 복귀하기를 원했던 그는 1968년 3월27일 전투기 추락사고로 죽었다. 향년 34세. 가가린 사후 2년반, 충격은 소련의 차례였다.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 이후 미국은 소련을 완전히 따돌렸다. 두번의 패배 이후 승승장구해온 미국의 기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 같지만 장담하기는 어렵다. 미국 우주개발인력의 40%가 50대 이상인 반면 중국과 인도에서는 젊은 인력이 중추이기 때문이다. 가가린은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우리말 인명사전에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이 가가린.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로 가가린을 써냈다가 공산권 사람을 골랐다고 혼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씁쓸하다. 158㎝의 단신으로 ‘우주의 콜럼버스’로 불렸던 거인은 이제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는 2008년 등장할 한국우주인의 훈련장소가 바로 ‘가가린 우주센터’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