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신문과 한국과학재단이 제정한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제25회(4월) 수상자로 한국화학연구소 김희영(45)박사가 선정됐다. 김박사는 반도체의 기본 재료인 다결정 실리콘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이 상을 받았다. 김박사가 개발한 기술은 국내 반도체 회사들이 전량 수입하던 다결정 실리콘을 국산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그의 연구활동과 학문세계를 소개한다.「1억 달러의 사나이」
주위 사람들은 김희영박사를 이렇게 부른다. 누구처럼 거액의 스톡옵션을 받거나 회사를 차려 큰 돈을 번 것도 아니다. 그가 개발한 기술을 94년 독일에 팔고 받은 로열티는 고작 380만 달러. 이중에서 김박사가 손에 쥔 돈은 몇 천만원을 넘지 않는다. 그래도 김박사는 「1억 달러」의 꿈에 부풀어 있다. 그가 개발한 기술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의 원료는 모래나 돌(규석). 모래나 돌이 반도체가 되려면 「다결정 실리콘→웨이퍼→반도체」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나라는 반도체의 원료인 다결정 실리콘을 모두 수입해 왔습니다. 반도체 강국이라고 하면서 정작 기본 재료도 못만든 거죠. 실리콘 수입량이 매년 1억 달러가 넘습니다.』
10년에 걸친 긴 연구였지만 상용화가 멀지 않았다. 김박사의 기술을 산 독일 바커사는 2001년에 모형 반응기를 건설한 뒤 2004년부터 실리콘을 본격 생산할 계획이다. 이 때부터는 매출액의 1~2.5%를 기술료로 받는다.
『남들은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어요. 정작 어려움은 독일과 기술계약을 맺은 다음부터였습니다. 영화 「쉬리」로 올해 대종상을 탄 영화배우 최민식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인기의 쓴 맛을 다 봤다고요. 건방진 얘기 같지만 저도 독일에서 연구의 쓴 맛을 봤습니다.』
김박사는 94년 독일의 바커사에 이 기술을 팔면서 잠시 언론을 타며 유명해졌다. 기술사용료도 적지 않았고, 한창 바람을 타던 반도체 관련기술이라는 덕도 봤다. 그러나 독일 바람은 매서웠다.
그는 계약을 맺은 뒤 한국에서 만든 장치를 다 뜯어서 독일에 싣고 갔다. 상용화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잘 되던 장치는 독일에서 말썽만 일으켰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곳이 고장났다. 생산 규모를 늘릴 때마다 사고가 났다. 그가 만든 반응기는 툭하면 폭발했다. 김 박사는 1년을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실리콘 제조장치에 매달렸다.
『밤이 되면 엔지니어들이 퇴근해요. 혼자 밤새며 기계를 돌렸죠. 그러면 잘 돼요. 그러나 아침에 퇴근해서 호텔에 가면 문제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것도 샤워하거나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으면 전화가 와요. 툭하면 변기에 앉아서 전화를 받곤 했습니다.』
기계가 고장나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독일 동료 한명이 신문을 갖고 와서는 큰일 났다는 것이었다. 또 무슨 일이 터졌나. 그 독일 친구는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연구소에서 날 보는 눈이 이상했어요. 한국에서 온 사람이 잘 하겠냐는 마음이었겠죠. 나를 포니와 BMW자동차에 빗댄 얘기도 나돌았어요.』
김박사는 자기를 「기술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얘기도 들었다. 말도 안되는 기술을 말을 잘해 독일에 팔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상용화는 틀렸고, 돈은 이미 받았으니 그만 포기하라는 말도 들렸다.
『오기가 났죠. 「보따리 싸서 돌아가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가도 마음을 다잡았죠. 한국 사람이 독일 사람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했지요.』
95년말에야 결국 실험이 성공했다. 그때까지 모두 7번 실패. 당시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아직도 휴우증을 앓고 있다.
『그뒤로 김포공항에 잘 못가요. 이번에 가면 또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돼서요. 어쩔 수 없이 독일에는 가지만 다른 나라는 그 뒤에 간 적이 없어요. E-메일받기도 때로 겁납니다.』
평생 갈지도 모를 병을 얻었지만 그래도 그는 뿌듯하다. 기술강국 독일에 공정기술을 수출했다는 것, 그 기술이 2000년대에는 상품으로 나온다는 것이 돈보다 더 자랑스럽다. 연구비를 댄 동부제강이 공장을 지으면 반도체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다.
김박사는 이 연구를 하면서 서정욱 과기부 장관과 얽힌 일화가 있다.
『서장관께서 차관 시절에 우리 연구실을 방문했어요. 그런데 불만이 많았나봐요. 나중에 전화를 걸더니 30분동안 왜 그렇게 밖에 못만들었느냐, 장치가 폭발하면 도망갈 비상구는 왜 안만들어 놨느냐, 그래서 기술을 수출할 수 있겠냐고 호통을 치셨죠. 나중에 보기좋게 독일에 수출해 체면을 세웠습니다.』
/대전=김상연 기자 DREA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