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김승웅 휴먼칼럼]아빠는 손을 놓지 않는다

이탈리아 영화<자전거 도둑>은 전후 실업난에 허덕이던 로마의 뒷골목 이야기다.주인공은 매사에 반박자 늦게 반응하는 실직자다. 그에게 그까스로 영화광고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일거리 하나가 주어진다. 주인공의 아내는 침대 시트까지 팔아 자전거 한대를 구입, 첫 출근하는 남편에게 선물로 준다. 주인공은 그러나 첫 날 그 자전거를 날치기 당한다.새삼<자전거 도둑>을 거론함은 영화의 스토리 때문이 아니다. 그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군중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영화 전편을 통해 군중들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이 군중들은 또 영화의 스토리 전개와도 무관하다. 그렇다면 감독은 과연 뭘 노린 걸까. 의문은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영화관을 나서면서 자연스레 풀린다. 감독은 영화에 등장하는 군중 모두를 자전거 도둑으로 몬 것이다. 더 확대하면 그 시절 그 상황의 로마 시민 모두가 자전거 도둑이 된다. 주인공은 결국 군중속에 희석돼 묻히고 만다. 영화의 원제가 자전거 도둑이 아닌<자전거 도둑들>이라는 점, 또 주연 배우나 조연 모두를 무명의 신출내기로 채운 것도 당시 감독이 지닌 의중의 일단을 말해 준다. 비미국 영화에 대해 평소 인색한 할리우드 비평가들도 이 이탈리아 영화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군중 동원을 남발, 주인공을 알게 모르게 군중이라는 괄호로 묶은 이 영화의 기법을 미 비평가들은<희랍적 합창>이라 격찬했다. 조금 비약이 될지 모르나 지금 한국의 실업난을 파악하는데도 나는 이 영화속의 군중을 곧잘 떠올린다. 지금의 실업은 실업자만의 실업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시민 모두의 관심사다. 그런 점에서 실업자 본인에게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실업자가 된 것이 나의 무능 때문이 아님을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 나부터 우선 이 위안에 얹혀 살고 있다. 내 경우 참 이상했다. 외국에 특파원으로 나갔다 귀국하면 나는 으레 실업자가 됐고 이번이 세번째다. 그래서 실업에 관한한 나는 남보다<대범한>편이다. 실업자 친구들을 만나면 그래서 곧잘 위로의 말까지 해 줄 정도다.<귀국할 때마다 나는 빈번이 내 수급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네>한번 당한 걸로 뭘 그리 걱정하느냐는 나의 위로에 적잖은 친구들이 자존심을 되찾는 것 같다. 그중엔 잃었던 유머까지 회복,<소금에 절여서?>라 낄낄대며 반문하는 친구도 상당수 있다. 실직기간을 오히려 알차게 살아가는 친구도 있다. 한 때 200여명의 사원을 거느리며 사업 수완을 보이던 나의 친구 權군은 백수가 되고 나서도 역시 수완을 보이고 있다. 주말마다 배낭속에 막걸리 두 되를 짊어지고 등산, 맑은 공기를 안주로 한잔 걸치고 내려온다. 그의 산행에는 고등학교 시절 평행봉에서 떨어져 척추가 마비됐던 단짝 친구가 반드시 낀다. 權군의 산행은 알고 보면 이 단짝 친구의 재활을 위해 의도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간 사업하느라 못 놀아준 부담을 실직 기간을 골라 우정으로 갚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실업은 실업자가 된 당신만의 실업이 아니다. 또 찬찬히 들여다 보면 우리가 정작 무서워 하는 것은 실업 그 자체가 아니라 직장의 귀속감에 절어 홀로서기가 힘들어진 심리적 습관임을 알 수 있다. 이 습관만 깨면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지구상에 직장이 생긴 것은 산업혁명이후로 200년이 채 못된다. 따라서 귀속감의 습관을 금연하듯 털어내기만 하면 된다. 특히 나처럼 50대 중반에 실업자가 되신 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다. 조심스레 꺼내는 얘기가 되겠지만 차제에 믿음생활을 시작해 보는 것도 실업의 두려움을 잊는 묘책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3차례의 실직에 비교적 대범할 수 있었던 것도 기도하고 간구하는 절대자를 모셔왔기 때문이다. 최상의 값비싼 진주를 구한 만큼 내가 투자한 30년 기자생활이 마감돼도 결코 아쉽지가 않다. 그리고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나의 간구에 그분이 항상 응답하시고 나를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믿는 종교에서는 이 절대자를 아버지라 부른다. 영화로 시작한 글인 만큼 역시 영화로 마감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영화<닥터 지바고>의 맨 마지막에 소련군 장성 계급장을 단 지바고의 친형이 지바고의 딸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난리속에 아버지와 어떻게 헤어졌느냐는 질문에 지바고의 딸은 울먹이며 대답한다.<아버지가 제손을 놓았어요>장군은 말한다.<그건 너를 낳은 아버지가 아니었다>진짜 아버지는 결코 손을 놓지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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