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지난 197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원자력 무대에 갓 등장한 신인 배우에 불과했다. 경험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열정 하나만으로 덤벼드는 무명 배우에게 크고 화려한 무대가 허락될 리 없었다.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과의 '한미 원자력협정'을 통해 데뷔 무대가 마련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고 그 제한된 무대에서나마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무명 배우가 바로 우리 원자력계였다.
한미 원자력협정, 선진협력체계 마련
우리나라가 원자력을 도입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도움 받는 입장에서 체결한 협정이라는 점을 감안해야하겠지만 기존 한미 원자력협정은 우리나라의 연구개발(R&D) 자율성을 크게 제약하는 측면이 있었다. 미국산 핵물질을 통해 생산된 사용후핵연료의 형상이나 내용을 변경하는 연구활동을 위해서는 매번 미국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하는 후진적인 협력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한 도전적 접근이 필수적인 R&D 분야에서 향후 계획에 대해 일일이 미국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은 그야말로 '손톱 밑의 가시'였다. 국가적 중장기 R&D 계획을 수립할 때도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 사실상 자율적 R&D 추진이 어려웠고 미국의 사전동의를 받기 위한 행정력과 시간 낭비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 땅에서조차 기초적인 연구활동을 맘껏 펼쳐볼 수 없었던 어려움과 서러움이 많았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원자력계는 그동안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원전 및 연구로를 수출하는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실력파 배우가 됐음에도 무명시절의 좁고 낡은 무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한미 원자력협정을 통해 조사후 시험 및 사용후핵연료 재활용 관련 현존시설에서 수행되는 R&D 활동에 대한 장기동의를 확보했고 향후시설에 대한 장기동의 절차와 요건 등도 상세히 규정하는 등 우리의 달라진 위상에 걸맞은 선진적 협력체계를 마련했다고 한다. 원자력 R&D의 새로운 무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사용후핵연료의 평화적 재활용을 위한 파이로프로세싱 기술 개발은 미래원자력시스템과 연계된 기술로 핵 폐기물의 양을 획기적으로 줄여 처분장 부지를 100분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 국내 주요 이슈이자 해결과제로 떠오른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해답을 줄 수 있는 기술이다. 핵물질을 다룬다는 민감성 때문에 오랜 기간 연구에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했었지만 이번 개정으로 연구현장에 활기를 불어넣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율적 연구개발에 활기 불어넣어
그동안 협상 추진 과정에서 농축·재처리·핵주권 등 온통 자극적인 이슈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바람에 많은 과학계 원로들은 자칫 '자율적 연구개발 추진기반의 확보'라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국익이 등한시되지는 않을까 우려했었다. 다행히 새로운 한미 원자력협정에서 이러한 우려를 대부분 불식시켰으니 우리 원자력계가 모두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필자는 단기간 내 기술자립과 원전 수출이라는 유례없는 기적을 만들어냈던 우리 원자력계의 저력을 믿는다. 원전 비리와 사고 은폐 논란으로 얼룩졌던 부끄러운 과거를 벗고 새로운 한미 원자력협정이 마련해줄 크고 화려한 무대에서 멋진 활약을 통해 국민에게 기쁨을 주는 '국민행복의 원자력'으로 거듭나야 할 시기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