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인천공항. 한국에 입국한 일본인 Y씨가 가방 2개를 든 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몇 분 뒤 환치기 업자인 한국인 A씨(45)가 Y씨에게 다가가 가방 2개를 잽싸게 건네받는다. 이들은 관세청 직원들이 6개월간의 정보분석과 제보를 통해 그들을 밀착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관세청 직원들은 인천공항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한국인 A씨를 미행했고 당일 주범 A씨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2개의 여행가방을 확보했다. 가방을 열었더니 100만엔 현금다발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밀수출 대금으로 총 3억2,000만엔(약 47억원)에 달했다.
"이들 일당의 교묘한 수법에 놀랐고 여행가방에서 쏟아지는 엔화자금 규모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불법 외환거래 현장을 목격한 관세청 직원의 설명이다.
무역업체와 환전상ㆍ환치기 업자가 짬짜미를 한 1조4,000억원 규모의 사상 최대 불법 외환거래는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이 금액은 지난해 관세청이 적발한 불법 외환거래 총 3조8,000억원의 40%에 달하는 규모다.
주범 A씨는 서울 동대문 일대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신종 환치기 수법을 개발해 대일본 무역업체를 모집했다. 주범 A씨의 꾐에 넘어간 무역업체들은 세관의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밀수출 대금을 엔화 자금으로 받았고 이를 환전상 B씨(58)를 통해 원화로 바꿨다. 주범 A씨와 환전상 B씨는 범행 모두를 공모한 사이였다. 환전상 B씨는 전달 받은 밀수출 대금의 불법환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보관 중이던 외국인 여권사본을 이용해 마치 다른 외국인에게 환전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했다. 또 혐의거래 보고를 피하기 위해 보고 기준인 미화 5,000달러 이하로 쪼개서 불법 환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환전상은 일종의 금융기관으로서 환전자의 실명을 확인해 장부에 기장하고 현금거래나 수상한 거래는 관계 당국에 협의거래 보고를 해야 했지만 이를 위반한 것이다.
관세청은 이들로부터 압수한 현금과 서류조사를 바탕으로 밀수출→현금반입→불법 환전→비자금 조성 등으로 이어지는 사건전모를 밝혀냈다. 또 불법거래를 부탁하는 등 자금세탁 혐의가 있는 130여개 대일본 무역업체도 확인했다. 환치기 업자와 환전상은 무역업체로부터 수수료 명목으로 39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관세청 관계자는 "보통 환치기는 불법 외환거래만 대행하지만 이들은 밀수출ㆍ자금운반ㆍ자금회수ㆍ불법자금 조성까지 모든 과정을 원스톱으로 대행하는 신종 수법을 동원했다"며 혀를 찼다. 관세청은 불법거래를 의뢰한 130여개 무역업체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