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찌든 얼굴로 힘없이 가게를 지키는 모습, 덩그러니 널려 있는 좌판들, 듬성듬성 나타나는 사람들.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재래시장의 모습이다. 지난 27일 오후 국내 최고의 건어물시장이라는 J시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32년째 멸치장사를 해온 송모(70)씨는 오후3시30분 한 손님을 맞았다. “나 차비도 없어.” 등산복 차림의 손님은 값을 깎았다.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손님은 달랑 1,000원짜리 한장 남은 지갑을 보이며 자리를 떴다. 이날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찾아온 고객은 고작 서너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곳은 달랐다. 28일 오후5시 대표적 재래시장 성공사례로 꼽히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 우림시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한 시간 남짓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호객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지나가는 손님만 쳐다보기에는 상인들이 너무 바빴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도 “한번만 보고 가라”고 붙잡던 J시장과는 대조적이었다. ‘컬러사진’과 ‘흑백사진’의 차이다. 우림시장은 빛깔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컬러사진이었다. 추석대목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 있었고 사람들과 물건은 넘쳐났다. “아무리 불경기라고는 하나 추석은 대목이지요.” 분주하게 돼지고기를 썰던 동원정육점의 주명호(55)씨는 며칠 전부터 평소보다 열배 이상 팔려나간다고 말했다. 특히 올 추석은 예년보다 길어 기대가 크다고 했다. 시장 초입에 있는 과일가게의 이재영(46)씨도 “평소보다 서너 배는 잘된다”고 했다. 시장 내에서만 유통되는 ‘우림시장표’ 상품권 판매는 지난해보다 출발이 좋다. 지난해 시장상인조합은 1만원권ㆍ5,000원권을 합쳐 1,000만원어치를 발행했다. 이중 600만원어치가 나갔다. 그런데 올해는 대목 시작도 전에 400만원어치가 팔렸다. 박철우(38) 시장상인조합 이사장은 “지난해 추석 하루 전날 2,500명이 우림시장을 찾았다”며 “올해는 분명 그 이상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우림시장도 여느 재래시장처럼 우여곡절을 겪었다. 우림시장은 지난 99년 까르푸, 2000년 이마트가 연이어 인근에 입점하면서 파리만 날리던 곳이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상인들은 똘똘 뭉쳐 2001년 국내 처음으로 비가림시설(아케이드)을 설치했다. 쇼핑 카트도 120대나 장만했다. 작지만 고객주차장(75대)도 만들었다. 중곡 제일시장에서 처음 시작한 쿠폰 발행도 벤치마킹했다. 쇼핑이 편리해지면서 떠났던 고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매출도 급신장했다. 8월 또다시 홈플러스가 들어섰다. 대형 할인점이 들어설 때마다 시장 매출은 30%씩이나 뚝 떨어진다. 이제 우림시장은 이마트ㆍ까르푸ㆍ코스트코ㆍ홈플러스 등 대형 할인점에 둘러싸인 외딴섬이 됐다. 위기감이 몰려왔다. 그럴수록 조합 임원들은 발바닥이 얼얼하게 뛰고 또 뛰었다. 박 이사장은 “이번 추석을 위기 탈출의 기회로 삼기로 했다”며 “3개월 전부터 ‘한가위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강조했다. 4월 전면 개정된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도 힘을 실어줬다. 총 1,308만원의 이벤트 비용 중 578만원은 서울시에서, 430만원은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보조를 받았다. 나머지 300만원은 시장 상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이 법에 따라 주차장 대여료도 20% 할인받고 리어카 상인을 위한 소방도로 점령허가권도 따냈다. 2004년 재래시장특별법 제정을 주도한 오영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부대시설이라는 ‘하드웨어’적 변화와 함께 시장 상인들의 인식 전환이라는 ‘소트프웨어’적 변화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우림시장에서는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 향기’가 났다. 힘들다고, 어렵다고 울상을 짓지도 않았다. 그래도 할 만하다고, 해보자고 희망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