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제야 방송통신위원회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정책결정의 잘잘못을 떠나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모습이 긍정적이라는 평가다.
실제 방송통신 정책을 총괄하는 방통위가 요즘 분주하다. 이명박(MB) 정부 임기가 반년 남짓 남은 상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방송법 시행령 개정, '접시 없는 위성방송'이라고 알려진 DCS(Dish Convergence Solution) 논란을 두고 업체와 얼굴을 붉혀가며 난타전을 벌였다. 여기에 이동통신사의 보조금 경쟁 문제와 망중립성 논쟁에다 행정법원의 휴대폰 요금 자료 공개 판결까지 더해져 한마디로 눈코 뜰 새 없는 듯하다.
지난달 29일에는 KT스카이라이프의 DCS 서비스에 대해 위법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서비스를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이해 당사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세간의 관측을 보기 좋게 뒤집은 발 빠른 결정이었다. 통상 정권 말기에는 정부 부처들이 새로운 일을 만들기보다 기존 정책을 추스리며 조용한 행보를 보이는 것을 감안하면 다소 이례적이다. 물론 시기를 떠나 정책 당국이 업계의 복잡한 이해 관계를 조율하고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종편 선정·퍼주기 몰두 허송세월 보내
하지만 최근 방통위의 분주함을 보노라면 밀린 숙제를 부랴부랴 하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업계 관계자들이 던지는 또 다른 이구동성도 "다 좋은데 뭐하다가 이제 와서 부산을 떠는지…"라는 말이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충돌 우려가 있는 제도 등을 사전에 정비했으면 순조롭게 풀릴 수 있는 사안이 제도 미비로 혼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다.
DCS 논란이 좋은 예다. 방통위의 위법 결정은 현행 법 테두리 안에서 사안을 판별할 수밖에 없다는 원칙론에 무게를 둔 판단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나오는 방송통신업계에서 DCS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의 등장은 시간 문제였다. 이런 시대 흐름에 대한 연구와 정책 대안 마련은 소홀히 한 채 종합편성채널(종편) 선정과 퍼주기에만 몰두한 채 허송세월한 게 방통위의 원죄다. 방송과 통신이 융합되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케이블과 위성방송은 방송법으로, 인터넷TV(IPTV)는 별도의 특별법으로 규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계철 방통위원장도 지난달 2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DCS가) 법률 조문대로라면 방송법상 위법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방송통신)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법률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인정했다. 이를 보면 KT스카이라이프가 "방통위가 이제서야 기술발전에 대한 연구반을 구성, 운영하겠다는 것은 그동안의 직무유기를 인정한 것"이라며 "기술 진화와 방통 융합의 의지를 가졌는지 의심치 않을 수 없다"고 반발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방통위가 연구반을 구성해 방송 기술 및 서비스 발전추세를 어떤 방식으로 허용할지 여부를 규정한 신규 법 제정 혹은 기존 법률안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방통융합 시대 맞는 제도 정비 힘써야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정부 조직 개편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방송통신업계에서도 ICT대연합 이라는 조직을 통해 정보통신기술(ICT) 전담 부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기 정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방통위 위상에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방통위라는 문패를 달고 일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남은 기간이라도 방통융합 시대에 걸맞은 제도 정비에 힘을 쏟아야 한다. 다만 밀린 숙제를 시간에 쫓겨 한꺼번에 하려다 보면 종편 선정과 같은 그릇된 결정이 나올 수 있는 만큼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