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지난 12일 간부회의에서 금융감독당국의 일처리 방식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상품 개발ㆍ인허가 등과 관련해 외국 금융회사들의 사전협의에 금융당국이 대답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고 한 뒤 "바쁘거나 애매하다는 이유로 규정에 부합함에도 접수를 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도 들린다"고 지적했다. 말 그대로 당국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내 몸 아끼기에만 열중한다는 뜻이다.
금융회사들은 감독당국의 이 같은 모습이 외국계 금융사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문제아' 취급을 받는 저축은행이나 카드 같은 2금융권은 물론이고 시중은행에서조차 사후에 말이 나올 수 있을 만한 일은 아예 처리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금융당국 사이에서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버섯처럼 광범위하게 퍼지는 보신주의=우량 저축은행인 A사는 2012회계연도(2012년 7월~2013년 6월)에 90억원대의 적자를 낼 예정이다. 금융감독원의 검사 후 쌓아야 할 대손충당금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B사도 100억원 이상의 당기순손실을 낼 예정이고 지방에서 탄탄하게 영업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 C사도 수십억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저축은행 업계의 한 대표는 "감독당국의 고무줄 충당금 적립 기준 탓에 검사를 새로 나올 때마다 충당금을 계속 쌓으라고 한다"며 "이러다가 모든 저축은행이 죽을 판"이라고 하소연했다.
감독당국이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이후 건전성 기준은 은행 수준으로 높여놓고 무조건 규제 강화만 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금융위원회가 준비 중인 저축은행 발전 방안도 마찬가지다. 펀드와 카드 판매 허용 등의 내용이 담겼다고 알려졌지만 정작 충당금 완화 같은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대놓고 규제 완화를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금융권의 고위 관계자는 "우리나라 관료들은 구조조정은 잘 하지만 정작 금융회사를 살리는 일은 잘하지 못한다"며 "혹시 생길 수 있는 책임 논란 때문"이라고 했다.
◇'8%룰'의 악몽…먹거리 정책 피하는 관료들=금융당국자들의 머릿속에는 저축은행 사태 당시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을 풀어줬다고 홍역을 치른 것이 똬리를 틀고 있다. 괜스레 당근을 줬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이런 상처는 업계에 대한 이른바 '먹거리 정책'을 쉽게 내놓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금융회사에 그대로 다가오고 있다.
당장 카드회사들은 규제 일변도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당국은 카드는 결제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각종 건전성 규제와 마케팅 제한, 카드 대출 옥죄기는 카드사에 적응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카드업계의 한 관계자는 "결제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은 이해하지만 다가올 모바일 결제 등을 위한 투자를 위해서는 카드사도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며 "가계부채 문제 등으로 감독당국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다.
은행도 상황은 비슷하다. 괜한 일로 당국의 심기를 건드리기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하자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다. A은행은 올 들어 은행에서는 처음으로 실버바를 팔려다 당국의 '괘씸죄'에 걸려 한동안 고생한 뒤 판매 얘기가 쑥 들어갔다. 실버바를 팔기 위해서는 금융위에서 부수업무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A은행은 당국과 사전협의 없이 은행 이사회에서 판매 방안을 승인한 뒤 이를 추진했던 것이다.
◇무조건 옥죄기에 머나먼 수익 창출=올 2ㆍ4분기 은행들의 순이익은 1조1,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조원이나 줄었다. 비율로는 48%나 감소했다. 삼성카드도 2ㆍ4분기에 전년 대비 수익이 55%나 급감했다. 6월 결산법인인 저축은행도 지금까지 잘 버텨오던 우량사 중심으로 대규모 적자가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신사업 진출을 통한 먹거리 창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저금리ㆍ저성장 상황에서는 리스크 관리도 중요하지만 돈을 벌어 기존의 부실을 메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고위 관계자는 "다른 분야와 달리 금융은 국가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에 당국이 가장 마지막에 움직여야 한다"면서도 "금융당국이 과도하게 안전 위주로 나가지 않는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했다.
◇사후 잣대 들이대는 검찰ㆍ감사원도 변해야=금융감독당국이 보신주의에 치중하게 된 데는 검찰과 감사원의 책임도 작지 않다는 말이 있다. 사후 잣대로 감독당국의 업무 처리에 문제를 제기하니 금융위나 금감원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말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은 하지 않거나 원칙대로 일 처리를 한다는 얘기다.
검찰은 저축은행 사태에서 부실을 잡아내지 못한 금감원 직원들을 직무유기로 기소했었다. 감사원도 사후 잣대를 들이대 금감원에 책임 추궁을 하고 상당수 직원들에게 징계를 요구했다. 금융위도 저축은행에 규제를 풀어줬다는 이유로 국회 등에서 질타를 받았다.
감독당국의 한 관계자는 "변양호 신드롬에 이어 저축은행 신드롬이 생길 정도"라며 "돈을 받았거나 고의로 부실을 숨겨준 이들은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지만 사후 잣대를 들이밀어 문제 삼는 것은 금융산업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