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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이슬람권에 인접한 이곳에서는 가톨릭 추기경을 대심문관으로 무수한 사람이 이단으로 몰려 죽어나간다. 이 때 예수가 나타나 가난하고 병든 이를 도우니 사람들이 몰린다. 하지만 한눈에 그를 알아본 아흔 살의 대심문관은 예수를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1,500여년 만에 돌아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국내 대표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문학평론가로서 소설 다섯 편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담긴 영성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지난해 같은 주제로 진행된 강의를 다듬어 모은 것으로, 앞서 대심문관 얘기도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나오는 얘기다. 이 외에도 문학평론가로서 '말테의 수기' '탕자, 돌아오다' '레미제라블' '파이 이야기' 등 최소한 제목 정도는 익히 들어본 작품을 풀이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대심문관은 지금 세상에서 기적과 신비, 권위 없이 교회가 겁쟁이 반역자의 양심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왜 광야의 40일에 마귀가 말한대로 빵을 만드는 기적을, 높은 데서 떨어지는 신비로움을 보여주지 않았느냐. 그도 저도 아니면 마귀의 제안을 받아 만국을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로 다스렸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좋아졌을텐데, 왜 이제야 나타나 힘들게 여기까지 온 교회를 방해하느냐고 비난한다. 어린아이처럼 대드는 대심문관을 예수는 조용히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는 말한다. "네가 잘 아는구나. 누구보다 잘 아는구나. 겉으로만 나를 따르는 자보다도 네가 나를 잘 알고 있구나"라고.
이 이야기를 작가는 이렇게 풀이한다. 대심문관이 세상을 잘 알고 예수님을 잘 아는데, 그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개탄한다. "영원한 빵,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고, 영원히 살 수 있는 피를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걸 위해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 그게 진짜다." 진정한 예수의 기적은 빵을 만들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에게 진짜 생명을 주는 기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영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탐욕스러운 육체와 끝없는 욕망의 구렁에 우리는 갇혀 있습니다. 출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실낱같은 바람을 쫓아가보면 거기 빛이 있고, 그 빛을 가로막고 있는 돌들을 생채기가 있는 손톱으로 긁어내고 긁어내다 보면 거기에서 바로 출구가 보이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여 뒤로 물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빛과 한 줄기 바람, 공기, 그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