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秘錄, 김우중 신화의 몰락] <3막 2장> GM1 : 비극의 序曲

DJ "GM, 투자협상 빨리 마무리를" 스미스 GM회장 "대우車 부채가 너무 많습니다"

GM을 이긴 기쁨도 잠시… 김우중 회장에게 GM은‘서방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FSO 인수전에서 GM을 이기고 환호의 함성을 지를 때(사진 위)도, 루 휴즈 GM사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투자를 약속할 때도 그는 승리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도전은 용납되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그것은 4년 뒤에 찾아올 비극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서울경제 DB


[秘錄, 김우중 신화의 몰락] GM1 : 비극의 序曲 DJ "GM, 투자협상 빨리 마무리를" 스미스 GM회장 "대우車 부채가 너무 많습니다"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車만 풀리면 모든게 해결" 자신 ㆍ쌍용차 인수·GM과 짝짓기 등 ㆍ환란속'그랜드 플랜' 앞당겨 ㆍDJ, 스미스 발언에 金회장과 거리 ㆍGM 만만디 행보속"경영권까지…" ㆍ98년9월 1차협상 7개월만에 결렬 김우중 회장의 경영인생에서 신화를 읽는 사람들은 이렇게 아쉬움을 반추하곤 한다. “26년간에 걸친 제너럴모터스(GM)과의 게임만 성공리에 마쳤더라면…. 그랬으면 신화의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대우 멸망의 원인(遠因)을 GM과 복잡하게 얽힌 인연의 사슬에서 찾으려 하는 데는 단순한 아쉬움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스토리가 담겨져 있다. 김 회장은 GM과 몽상과도 같은 게임을 벌였다. 결말 없는 게임, 관객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마침내 무대 한 편으로 밀려난 김 회장. 버림받은 그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였다. 그 자신도 떠나는 것. IMF 한파. 살인적인 금리였다. 부채 증가는 곧 파멸로 한 발자국을 내닫는 것을 의미했다. 빚이 많은 대우로선 더더욱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들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바로 그 때, 김 회장은 말했다. “(대우는)일찍이 세계경영에 나서 위기 대처 능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대우는 (외환 금융위기라는)난관에 움츠리기보다 확대지향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98년 1월 신년사) 시대에의 역류(逆流). 김 회장은 그 즉시 폴란드에 머물던 자신의 분신(分身) 김태구 사장을 불러들였다. “자네가 맡아줘야 겠어.” GM을 이긴 기쁨도 잠시… 김우중 회장에게 GM은'서방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FSO 인수전에서 GM을 이기고 환호의 함성을 지를 때(사진 위)도, 루 휴즈 GM사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투자를 약속할 때도 그는 승리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도전은 용납되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그것은 4년 뒤에 찾아올 비극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서울경제 DB 극비 프로젝트, 김 회장은 바로 GM과의 협상을 김 사장에게 지시한 것이다. 쌍용과 기아, 삼성차까지 인수해 현대차와의 이원화 체제 구축, 그리고 GM과의 짝짓기…, 그는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기 위한 ‘그랜드 플랜’을 오래 전부터 품어왔다. 우호 관계인 김대중(DJ) 정부의 출범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에 절호의 기회였다. 김 회장은 그 시기를 바짝 앞당기고 나섰다. 비극의 씨앗은 여기서 싹텄다. 12월8일 그는 쌍용차를 인수하면서 2조원의 빚를 넘겨받았다. 뚜껑을 연 쌍용차는 ‘돈 먹는 하마’였다. 30%로 치닫는 금리, 김 회장은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고 있었다. 카드가 필요했다. “자동차만 풀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는 또 다시 자동차에서 꼬인 매듭을 풀기로 했다. 곧바로 오랜 애증(愛憎)의 친구인 GM과 연락이 닿았다. 2년 전 폴란드 FSO와 몇 달 전 쌍용차 인수전에서 패배를 맞보았던 GM은 김 회장의 무자비한 확장경영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GM이 어쩐 일인지 너무나 쉽게 대우의 제안에 응했다. 궁짝이 맞았을까, 복수를 위해 SOS를 들어준 척 한 것일까. 약혼(MOU) 선언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98년 2월2일 대우센터. 김 회장과 앨런 패리튼 GM코리아 사장이 손을 잡았다. 5년여만에 재결합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여기서 앞으로 펼칠 스토리를 위해 뿌리깊은 둘만의 인연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세월을 거슬러 1972년. 질긴 관계는 이때 시작됐다. 출발점은 신진자동차였다. 신진은 당초 도요타와의 제휴를 추진했다. 도요타는 김 회장이 매년 설 때마다 찾을 정도로 동경(憧憬)했던 곳. 상황은 꼬였다. ‘한국과 대만에 투자한 자는 교역하지 않는다’는 주은래 중국 수상의 원칙, 중국 진출을 추진하던 도요타는 신진과의 제휴를 포기했다. 그래서 신진이 눈을 돌린 게 GM이었다. GM코리아는 이렇게 탄생했다. 신진과 GM은 그리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GM은 햇병아리 한국 기업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GM코리아도 경영난이 심화됐다. 76년 GM코리아는 결국 산업은행 관리에 들어갔다. 산은은 신진을 넘겨받아 이름을 ‘새한자동차’로 바꿨지만 골치덩어리였다. 산은이 이 때 찾은 사람이 김 회장이었다. 83년. GM코리아를 넘겨 받은 김 회장은 이름을 대우자동차로 바꿨다. GM과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제휴를 맺을 당시에는 그런대로 사이가 좋았다. 공동으로 월드카 ‘르망’도 개발해 수출도 했다. 좋은 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만성적인 노사분규에 시장 공략도 만만치 않았다. 현대차가 버티고 서 있는데다 기아도 봉고신화를 앞세워 급성장해나갔다. 생산 모델을 놓고도 갈등이 빚어졌다. GM은 대우가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헌데 김 회장은 티코로 ‘맛’을 보자 잇따라 독자모델 생산에 나섰으니…, 둘 사이의 관계가 꼬이기 시작했다. 동거 9년 만인 92년 10월. 둘은 결국 갈라섰다. GM과의 동거로는 ‘세계’를 향한 욕구를 채울 수 없었던 그에게 결별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팽창전략. GM과의 갈등은 증폭돼 갔다. FSO에서부터 97년 우크라이나 ‘오토자즈’ 인수전, 루마니아에 이르기까지. 동구권 곳곳에서 사사건건 둘은 맞부딪쳤다. 자동차를 전면에 내세운 도전, 그것은 서방의 상징인 GM에 대한 저항이었다. 시계를 다시 돌려 98년 초. 처음에는 협상이 급진전을 보이는 듯했다. 4월25일 청와대. 방한한 GM의 2인자 루 휴즈 해외총괄 사장은 DJ에게 장밋빛 그림을 펼쳤다. “대우와 광범위한 합작을 추진중이다. 대우 국내외 사업장에 지분 30~50%를 참여할 계획이다.” 한 푼의 달러도 아쉬웠던 때. 김 회장은 “GM으로부터 적어도 100억달러를 끌어 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고, DJ에게 김 회장은 ‘진정한 애국자’였다. 김 회장의 ‘대마불사론’은 화려하게 빛을 내는 듯했다. GM과의 협상과 동시에 그랜드 플랜의 한 축인 기아차 인수를 위한 의욕도 불타 올랐다. 3월말 경주에서 열린 마티즈 문화예술행사. 김 회장은 이날 “정부가 기아차의 매각방침을 정하면 대우는 분명히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야심을 드러냈다. “기아를 인수하면 일부 차종의 생산시설을 해외공장으로 이전할 수 있다. 기아 인수에 따른 실업문제는 한국 내 대우공장 생산량을 늘리면 된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파멸의 기운은 절정에 이른 순간 다가왔다. 잘 나가던 협상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GM의 ‘만만디’ 기질은 여지 없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휴즈 사장이 다녀 간 후 가속도가 붙어야 할 협상은 도리어 거꾸로 돌아갔다. 동상이몽, 김 회장의 생각도 다른 곳에 있었다. ‘지분 50%’의 함정이 불거지는 순간이었다. 대우의 속 모습을 알기 시작한 GM은 내친 김에 경영권을 뺏어 골치거리를 제거하려 했지만, 김 회장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처음부터 ‘제휴’가 아닌 ‘매각’의 카드는 생각조차 하지않고 있었다. GM은 도전자 대우의 ‘속 모습’을 꽃 감 빼먹듯 빼먹으려 했다. 외상경영의 진면목을 알아 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것이 M&A 협상의 정석이었든, GM 특유의 기질이었든. 김 회장은 그런 GM의 뜻에 ‘부응’하지 않았다. 대우는 핵심 자료들을 끝까지 GM에 내놓지 刻年? 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이후 GM과의 협상에 참여했던 채권단 고위 관계자의 풀이. “1년 전 테이블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끝을 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워크아웃에 들어가지 마자 GM에 손을 내밀었어요. 대우차 세부 자료들도 넘겨 줬구요. 헌데 GM이 의아스런 반응을 보이더군요. 대우와 협상하는 동안 채권단이 준 자료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살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니…. 살려는 사람이 관심이 없든지, 팔려는 사람이 팔 의지가 없었든, 둘 중 하나가 아니었겠어요.” 파국의 전조일까. 99년 6월9일. 미국을 방문한 DJ는 잭 스미스 GM회장과 만났다. 대우차 협상을 빨리 끝내주길 바라는 요청이었다. 대규모 외자(外資)를 들여오는 것 만큼 세일즈 외교를 돋보이게 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스미스는 너무나 싸늘했다. “대우차의 부채가 너무 많습니다.” 최근 만난 대우차 전 임원 A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김 회장에 대한 DJ의 실망은 이 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릅니다. 그 때 스미스 회장이 조금만 좋게 말했더라면….” 역시 GM이었다. FSO 인수협상에 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폴란드 정부를 녹아 내리게 했던 GM. 그들이 섣불리 투자 결정을 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설상가상일까. 악재는 겹쳤다. 세계 자동차 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GM의 파업이 터진 것이다. 그 해 6월 54일 동안의 파업으로 GM은 40억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대우차를 인수할 만한 규모였다. 2년 뒤 발생한 포드의 타이어결함 사태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 협상은 그렇게 질곡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아니 협상이란 표현 자체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배반, GM은 7월 난데 없이 기아차 입찰 참가를 선언했다. 파경이 사실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98년 9월 10일 서울 힐튼호텔. 김 회장은 결렬을 선언했다. 그룹의 목줄을 걸고 극비로 진행했던 GM과의 1차 프로젝트는 이렇게 사라졌다. 1년 뒤 다가올 비극의 서곡은 이렇게 울리기 시작했다. 입력시간 : 2005/06/2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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