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교수팀은 왜 없는 데이터를 가공으로 만들어내면서까지 논문을 조작하는 과학적 범죄행위를 저질렀을까.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가 나오면서 황 교수가 과학자로서 자기 무덤을파는 행위를 벌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황 교수는 1999년 2월 국내 최초의 체세포 복제소 '영롱이' 탄생 이후 승승장구했다. 물론 황 교수 신화의 초석이 되었던 '영롱이'도 지금에 와서는 진위여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황 교수는 이후 광우병 내성소, 백두산 호랑이 복제, 무균 돼지, 세계최초 인간 배아줄기세포 확립 등 거의 해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과학적쾌거라고 스스로 '홍보'하며 잇따라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이를 통해 황 교수는 국내 최고 과학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언론은 이런 황 교수의 연구업적을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보도했고 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과학계 일각에서 검증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반영되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정부도 황 교수 지원에 발벗고 나섰다.
'황우석 스캔들'은 사실 언론과 정부의 전폭적 지지아래 제대로 된 평가없이 황교수 띄우기에 급급했던 조급증이 빚은 과학적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황 교수는 일찍이 언론의 생리를 간파하고 언론을 자기 편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언론의 눈을 속이기는 쉬웠다. 서울대 조사위 주변에서는 황 교수의 논문 조작은 이런 유리한 언론 환경에서 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2004년, 2005년 사이언스 논문 조작이 가능했던 이유로 서울대 수의대 황 교수 연구실의 폐쇄적인 분위기도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황 교수 실험실은 기술 유출을 막는다는 이유로 국가 중요 시설로 지정돼 외부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곳이었다.
게다가 황 교수팀은 실험실 안에서 누구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정도로 철저한 분업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여기에 체세포 핵이식 인간 줄기세포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난자가 필요한데, 이를 조달할 수 있는 연구팀은 국내외적으로 황 교수팀 이외에는 사실상 없었던 것도 황 교수가 조작의 유혹을 느낄 만한 대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 교수팀이 적어도 수년 간은 다른 연구팀이 과학적으로 재연할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논문을 조작하더라도 국내외에서 이를 밝혀낼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줄기세포연구 선점 효과를 노렸을 것으로 과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황 교수가 상식의 저항을 느낄 정도로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을 벌인심리적 배경에 대해 PD수첩에 황 교수 연구의혹을 제보한 한 제보자는 "황 교수는항상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굉장히 심했다"고 말했다.
그게 없으면 황 교수는 무너지게 돼 있었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그 압박감을 한번에 해소하기 위해 10년을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이제보자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