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영화 ‘서부전선(사진)’ 또한 ‘웃기고 울리려 노력하는’ 그저 그런 한국영화가 아닐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추측은 보기 좋게 틀렸다. 영화는 예상하지 못했던 기분 좋은 해학과 강요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눈물로 가득했다. 한편으로 뛰어난 반전(反戰)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는 전쟁을 옹호하는 ‘대의’와 ‘명분’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총성과 포화가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파괴하는지를 세련된 방식으로 말한다. “그 어떤 전쟁에도 해피엔딩은 없다”는 감독의 메시지는 지나치게 비장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절대 가볍지 않은 방식으로 훌륭히 도착했다.
마흔이 넘은 농사꾼 남복(설경구)은 한국전쟁 휴전 3일 전 군에 끌려와 비밀문서를 전달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느지막이 맞은 아내에게 갓 아이가 태어났을 때였다. 아이 이름도 못 짓고 끌려온 남복에게 전쟁이 무엇이며 기밀문서의 내용이 뭐 그리 대수랴. 그저 집에 돌아가 아내와 아이를 만나는 것만을 간절히 바랄 뿐. 그런데 적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비문을 잃어버리고 만다. 어떡하나. 비문을 찾지 못하면 총살이란다.
북한 369부대 탱크병 막내 영광(여진구)의 사정도 비슷하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는 평범한 열여덟 학생은 하루아침에 군인이 됐다. 할 줄 아는 거 하나 없이 명령에 복종하며 집에 갈 날만을 기다리는데 부대가 폭격으로 전멸한다. 죽어가던 상관은 영광에게 ‘땅끄를 사수할 것’을 명령한다. 땅끄를 사수하지 못하면 총살이란다.
‘비밀문서를 찾지 못하면 총살당할’ 위기에 빠진 남복(설경구 분)이 ‘땅끄를 사수하지 못하면 총살당할’ 처지에 놓인 영광(여진구 분)을 서부전선에서 만난다. 딱 봐도 군대 무식자인 두 명이 맞붙어 벌어지는 좌충우돌이 영화가 자아내는 주된 유머. 날아가는 새만 봐도 놀라는 새가슴의 소시민 두 명이 뭘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고 누굴 위해 총을 든 지도 모르는 채 서투른 위협을 서로 가하고 몇 번이나 바닥을 나뒹군다. 본인들은 절체절명 심각한데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 모습이 귀엽고 우습다.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감독은 찰리 채플린의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게 전쟁이라고 생각해 소재로 가져왔다고 한다.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속 슬랩스틱(과장된 액션을 특징으로 하는 희극)에서 채플린의 영화들이 언뜻 스치는 게 우연은 아닌 셈이다.
영화의 더 큰 장점은 코미디를 표방한다고 해서 전쟁의 비참함을 어설프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을 묘사한 장면은 예상보다 더 적나라하고 아프다. 갑작스레 전쟁에 노출된 소시민들의 삶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2005년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서부전선’은 전쟁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덧없음을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북한과 남한의 국기를 둘 다 가지고 있다가 어떤 군이 오느냐에 따라 바꿔 드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전쟁통에 가족 하나 안 죽은 사람 어딨냐”는 남복의 일갈에 비명횡사한 첫째 형부터 여섯째 형까지 줄줄이 소환하는 영광의 말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웃기면서도 슬픈, 웃음을 통한 페이소스(동정과 연민의 감정)가 자못 강렬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어김없이 좋다. 설경구와 여진구의 콤비 또한 예상보다 훨씬 더 잘 어울렸다. 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