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한 우체국에서 60대 남자가 50만원쯤 되는 돈을 송금하려고 했다. 그는 창구 직원으로부터 주민등록증제시를 요구받았다. 하나 주민증을 지참하지 않은 듯 며칠전엔 주민증이 없어도 되더니 오늘은 왜 안되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우체국 직원은 그때는 그랬다해도 오늘은 안된다며 주민증 제시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는 끝내 화를 내면서 송금을 포기하고 돌아섰다.같은 서울의 한 시중은행 지점. 거액의 자금을 예치해 준다는 조건으로 차명계좌 개설이 가능한지를 전화로 문의하자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일부 은행장은 한술 더 떠서 차명을 알선해 주겠다고까지 했다.(최근 모 방송 보도)
이것이 지금의 금융실명제 모습이다. 서민들에겐 불편하고 돈 있는 사람들에겐 얼마든지 빠져 나갈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실명제가 유명무실하고 눈이 멀어(실명)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실명제는 김영삼정권이 자랑하는 개혁시책이고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정부는 검은 돈의 설 자리가 없어지고 과세공평과 투명사회를 이루게 됐다고 자찬했다.
그러나 실명제 실시 3년이 넘었지만 차명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실명전환이 안된채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돈이 아직도 4조원에 이르고 지하경제는 실명제 전보다 더욱 부풀어 올랐다.
더욱이 실명제를 지도하고 정책에 앞장서야 할 은행이 차명을 알선하고 탈법을 부채질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왔던 것이다. 이 공공연한 비밀을 정부와 감독기관만 몰랐는지, 아니면 최대 치적의 허점이 노출되는 것을 꺼린 나머지 덮어두려 했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차명거래는 근절되지 않았고 실명제는 헛바퀴를 돌고 있다.
일부 은행지점장은 사채브로커의 신분증을 이용, 차명계좌를 만들어 예금을 유치한 것으로 드러났고 차명계좌용 주민증과 차명자 리스트까지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사채시장 브로커들은 분실 또는 위조 주민증을 이용한 도명계좌까지 알선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들통나지 않는 점을 이용한 수법이다.
없어지리라 장담했던 지하경제가 번창하고 검은돈과 연결된 부정 부조리와 공직자 범죄가 여전한 이유를 알 것같다.
우리나라의 금융풍토에서 치열한 예금유치 경쟁이 빚은 탈법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실명제까지 위반해가면서 예금 유치경쟁을 하는 것은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차명의 근절은 실명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낮잠을 자던 감독기관이 뒤늦게 조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얼마나 파헤치고 처벌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차명을 봉쇄하지 않고서는 금융소득종합과세는 허울뿐이고 실명제는 부가세와 같이 반쪽 실명제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