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진의 할리우드 21]獨 출신 빌리 와일더 타계지난달 27일 95세로 타계한 빌리 와일더는 글재주가 뛰어난 감독이었다. 그가 각기 따로 함께 일한 찰스 브래켓과 I.A.L.다이아몬드와 공동 집필한 일련의 명작들은 '글영화'라 불러도 좋을 만큼 탁월한 문장과 대사를 갖춘 것들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와일더가 나치를 피해 1934년 독일서 할리우드로 왔을때만해도 그는 영어를 몰랐다는 점이다. 와일더는 라디오와 영화를 통해 매일 새단어 20개씩을 습득했다.
이런 글솜씨는 와일더가 베를린서 사건기자로 활약할 때 터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허구가 아닌 어두운 사실을 보도하던 그의 글솜씨는 후에 걸작 필름 느와르'이중배상'같은 작품에서 재현됐다. 촌철인의 글이다.
와일더의 영화 '제17포로수용소'에 나와 오스카 주연상을 탄 윌리엄 홀든은 와일더를 "면도날로 가득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표현한 바 있다.
와일더는 저돌적으로 솔직하고 사악할만큼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특징은 그의 최고 걸작중 하나인 '선셋대로'에서 잘 나타난다.
한물 간 무성영화 스타 글로리아 스완슨이 쏜 총에 등을 맞고 풀에 눈을 뜨고 엎드린채 떠있는 젊은 기둥서방 윌리엄 홀든의 독백.
"불쌍한 바보 그렇게 풀을 갖고파 하더니 결국 온통 갖게 됐구먼"이라며 사자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
모든 장르를 섭렵한 와일더는 1938년~1950년까지 브래켓과 함께 각본을 썼다. '니노치카' '정열덩어리' '이중배상' '잃어버린 주말'에 이어 '선셋 대로'로 둘의 글은 절정에 이른다.
특히 타락한 보험회사원과 살인자인 아내가 돈과 욕정에 눈이 멀어 여인의 남편을 살해하는 '이중배상'에서 두 간부가 주고 받는 사악하고 성적인 대사의 조롱기는 가히 치명적이다.
와일더는 '하오의 연정'을 시작으로 1957년부터는 I.A.L.다이아몬드와 공동 집필했다.
그중에서도 섹스 소극'뜨거운 것이 좋아'는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두사람의 글이 달짝지근한 감상성과 함께 아름답게 피어난 영화가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아파트 열쇠를 빌려줍니다'. 인간 탐욕을 조롱하면서도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로맨틱한 명화다.
와일더가 제2의 고향인 미국을 냉소적으로 본 까닭은 그가 궁극적 이방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건기자의 객관성과 유럽의 전통을 지녔던 그에게 미국은 결점 있는 약속의 땅이었을 것이다.
/한국일보 LA미주본주 편집위원ㆍLA영화비평가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