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심층 진단] '영혼없는 관료'들의 정책 실패 상징물… 기업만 발동동

■ 다시 표류하는 정책금융 개편안<br>통합산은법 발의 차일피일… 올 국회통과 힘들 듯<br>합병대상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사표 리더십 부재<br>사실상 신규여신 중단돼 중기 자금난 등 부채질



수요자 중심의 정책금융 기능을 강화하겠다며 금융당국이 야심 차게 내놓은 정책금융개편안이 국회에서 길을 잃었다. 자신들이 발표했던 정책을 불과 4년 만에 180도 뒤집어놓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모습에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마저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더욱이 정책개편안을 내놓은 후 합병 대상인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사표를 내고 떠나버렸고 법안 통과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정책기관 전체의 조직운영이 표류하는 상황이다.


정책금융개편안이 새 정부 들어 금융정책 실패의 대표적 상징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인데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정책금융의 수요자인 중소∙중견기업들에 돌아가고 있다.

◇지연되는 통합산은 입법작업…통합산은 TF도 잠정 중단=29일 금융당국과 국회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정책금융개편안이 통합산은법 입법작업이 늦어지면서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당국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정부발의보다 절차가 단순한 의원입법을 통해 관련 법을 통과시키고 내년 7월1일 통합산은을 출범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총대를 메야 할 정무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들이 개인 입법발의를 꺼리고 있고 4년 만에 금융정책을 완전히 뒤집은 당국의 책임론까지 부각되면서 통합 스케줄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금융위는 최근 정무위 소속 송광호 새누리당 의원에게 통합산은법을 설명한 후 입법발의를 요청했고 최경환 원내대표까지 거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할 가능성은 낮다. 정무위 소속 부산지역구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선박금융공사 설립 공약 무산을 당국에 집중 추궁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통합 당사자인 정금을 부산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이 부분의 교통정리가 우선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송 의원은 "현 상태로 발의하면 분란만 일으킬 것"이라면서 "내년 6월이나 가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금의 부산 이전을 요구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선박공사 무산으로 부산 민심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내년 6월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어 통합산은법 처리가 불투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러자 산은 통합 태스크포스(TF)도 개점휴업 상태다. 산은은 지난달부터 성기영 기획관리 부문 부행장을 위원장으로 TF를 운영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과 중장기 경영전략 수립을 위한 계약도 맺었다. 하지만 법 통과가 지연되면서 TF 무용론마저 나오고 있다.


◇금융정책 실패 인정 안 하는 당국…영혼 없는 금융관료들=겉으로 보면 통합이 국회 때문에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당국의 개편안 자체가 여당에조차 동의를 못 받을 만큼 문제가 많다. 4월 정책금융재편 TF가 출범할 때만 해도 기대감은 높았다. 중복된 정책기관의 비효율성을 해소하고 수요자 중심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큰 틀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TF 내에서 위원들 간 활발한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TF 참여자조차 "중장기 관점에서 어떻게 재편할지 고민이 부족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결국 TF는 청와대 입김과 부처 간 밥그릇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당초 취지가 퇴색했고 결과물은 대내정책은 산은과 정금 통합, 대외정책은 현 체제 유지였다. 산은과 정금의 통합은 4년 만에 금융위가 주도했던 분리작업을 스스로 뒤엎은 것이지만 금융위는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4년 전 산은 민영화 추진 당시 핵심 근거가 '시장 마찰 해소와 정책금융 강화'였는데 이번에는 두 기관의 통합 논리로 둔갑됐다. 정책실패는 인정하지 않고 현 정권의 정책방향만 달성하면 된다는 얘기로 들린다. '영혼 없는 관료'의 전형이다.

관련기사



◇금융정책의 실패…피해는 고스란히 기업들에=정책실패는 정책금융 수요자인 중소∙중견기업들에 돌아간다. 어설픈 개편안이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표류하면 기업들만 제때 필요한 자금을 공급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9년 설립 이후 온렌딩 대출을 통해 1만2,000여개 중소∙중견 업체에 총 16조7,000억원의 정책자금을 공급해왔던 정금은 현재 수장이 없다. 국감을 불과 20여일 앞둔 7일 진영욱 사장이 물러났다.

경기악화로 중소기업들의 자금수요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현 구도에서 정금은 신규여신을 늘리기도 어렵다. 실제 정금은 진 사장 퇴임 이후 사실상 현재 수준의 자산을 유지하는 쪽으로 선회한 상태다.

현장에 있는 기업들도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세라믹칩과 안테나부품을 생산하는 중견기업의 한 관계자는 "산은과 정금이 통합하면 자금공급 여력이 축소되고 여신 익스포저가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밝혔다. 한 제약업체 관계자도 "업체 특성상 연구개발자금 지원이 필수인데 두 기관의 통합으로 공급여력이 줄면 누가 대신 지원해줄지 의문"이라면서 "현재 개편안마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 수요자 입장에서는 매우 불안하다"고 말했다.

현재 무역보험공사가 독점하고 있는 단기수출보험을 오는 2017년까지 민간에 개방하도록 한 대외정책금융개편안도 문제다.

단기수출보험은 대기업의 경우 손해율이 90% 내외인 반면 중소기업은 130%에 달한다. 보험료를 100원 걷으면 대기업은 10원이 남지만 중소기업은 오히려 30원가량 손해가 나는 구조다. 무보는 중소기업 가입비중이 높은 단기수출보험에서 손해가 나더라도 중장기수출보험에서 얻은 이익으로 이를 상쇄해왔다. 정책금융기관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단기수출보험이 개방되면 수익을 우선하는 민간 보험사들은 양질의 대기업 거래를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 장사가 안 되는 중기 보험은 무보가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보험료 인상은 불가피해지고 중소기업만 피해를 입게 된다.

서민우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