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재무 설계는 크게 퇴직 전과 퇴직 후로 나뉘어져 그 내용이 달라진다. 퇴직 전, 즉 현직에 있는 동안에는 노후 필요 자금을 축적하는 시기라는 의미에서 축적 단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때의 자금 설계는 목표 자금을 어떻게 잘 모으느냐에 맞춰져야 한다. 반대로 퇴직 후 은퇴 시기는, 준비된 자금을 순차적으로 소진해 가는 기간이라는 의미에서 분배 단계로 구분된다. 이 단계에서의 재무 설계는 주어진 자금을 어떻게 잘 굴리면서도 잘 쓰느냐 하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둬야 한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주로 논의되던 재무설계는 주로 축적단계의 저축, 투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이비부머의 대규모 은퇴가 시작됨에 따라 분배 단계 재무 설계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는 우리보다 앞서 베이비부머의 은퇴 시작을 맞았던 서구에서 10여 년 전에 밟았던 길이기도 하다.
은퇴 기간의 재무 설계에서 우선 결정해야 할 것은, 은퇴 자금을 내 스스로 관리하면서 일정 금액을 정기적으로 뽑아 쓸 것이냐 아니면 1년 단위로 미리 확정된 금액을 지급받는 연금상품을 구입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스스로의 자산관리에 자신이 없거나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하는 은퇴자들이라면 연금 상품의 구입, 즉 연금화 전략이 적합하다. 그렇지만 연금 상품도 정기적 연금지급액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매년 시장금리에 따라 달라지고, 사업비 등 상품 수수료가 상대적으로 비싸다는 문제가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목돈 수요에 속수무책이라는 점도 단점으로 꼽힌다.
스스로의 자산관리에 경험과 자신이 있고, 미래에 돌발적으로 발생할지 모를 비상시 현금 수요에 대비코자 한다면 스스로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면서 일정 금액을 예금 등 금융상품에서 인출해 쓰는, 소위 단계적 인출 전략을 택할 수 있다. 자산배분과 투자전략에 따라 자신에게 적합한 맞춤형 설계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투자수익률과 기대여명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수익률이 부진하거나 수명이 길어지면 당초 설계와는 달리 사망 시점 이전에 자금이 소진될 확률이 존재한다.
연금화냐 단계적 인출이냐는 꼭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적절히 혼합할 수 있는 보완적 관계이다. 만일 둘을 병행하여 일정 혼합 비율을 정한다면, 국민연금으로 최소한의 연금화는 되어 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으로 80만원의 월 소득이 확보돼 있을 경우, 연금상품에서 40만원, 단계적 인출에서 80만원이 추가로 확보되도록 은퇴자산을 나눌 수 있다.
연금상품을 구입하면 모든 것이 사전 계약된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이 특별히 의사결정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단계적 인출을 선택하게 되면, 어떤 자산에 얼마나 투자하고 매 기간마다 인출금액이나 비율은 얼마로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대수명이 30년이고 가지고 있는 주식, 채권, 수익증권, 예금 등 금융자산의 기대총수익률이 5%라면 최초 은퇴자산의 4%, 즉 1억 원이면 400만원 상당의 금액을 매년 물가를 반영하여 뽑아 쓰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기대수익률과 기대수명이 확실하지 않다는 데 있다. 다행히 수익률이 좋고 실제 수명이 예상대로라면 풍요로운 생활을 하다가 자식들에게 유산까지 물려줄 수도 있지만, 수익이 기대보다 나쁘고 수명은 늘어난다면 생존 기간에 자금을 몽땅 소진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기대수익률과 실제수익률 간에 현격한 차이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든지 자신의 건강상태가 아주 좋거나 또는 급격히 악화되었을 때는 자산배분비율을 재조정하고 인출금액을 변경해야 한다. 그래야만 너무 궁핍하지도 너무 방만하지도 않게 은퇴자산을 나누어 쓰면서 본인 혹은 배우자 임종 시에 완전 소진하는, 최적의 은퇴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결국 단계적 인출 전략은 설계 당시 한번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상황, 자신의 건강 상태에 따라 중간 중간 수시로 조정돼야 한다. 요즘 발달된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도로 소통 상황과 주행 속도에 따라 예상 도착시간과 최적 경로를 수시로 조정해 주듯이 말이다. 비유를 하자면 은퇴자 본인은 운전자이고 재무상담자는 내비게이션이다. 운전자 스스로가 실시간 도로 정보를 파악하고 새로운 변경 경로를 추정하기 어렵듯 은퇴자가 시장의 변화와 그에 따른 자신의 최적 인출 전략을 스스로 수립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다. 따라서 재무상담자는 내비게이션으로서 몇 가지 추천 경로를 제시해 주는 도우미 역할을 수행한다.
남자가 꼭 따라야 할 여자가 셋 있는데 부인, 캐디, 내비게인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은퇴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부인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노후의 경로를 안내해 줄, 내비와 같은 충직한 재무상담자를 친구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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