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4월 21일] <1676> 신불분리령


1868년 4월21일, 일본 메이지 정부가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내렸다. 골자는 말 그대로 신도(神道)와 불교의 분리. 포고령은 신사의 불상숭배 금지와 신사에 안치된 불상과 방울ㆍ범종ㆍ불구 등의 철거를 내용으로 담았다. 신불분리령은 일본 불교사상 유래 없는 박해를 가져왔다. 낭인들과 신관 출신으로 구성된 이른바 신위대(神威隊)가 사찰을 돌아다니며 운영권을 빼앗고 불상과 불구를 파괴하거나 불질렀다. 일본은 왜 교리가 빈약한 신도를 내세워 '폐불훼석(廢佛毁釋)'을 저질렀을까.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실상의 군주인 쇼군에 눌려 때로는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국왕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토착신앙이자 왕족의 종교인 신도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인위적인 분리령이 나오기 전의 상황은 신도의 불교에 대한 종속. 부처가 신의 중심이며 신도에서 받드는 신은 중생을 위해 나타난 보살이라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은 신도를 통치이념으로 세우려는 신정부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전국 12만개의 사찰이 호적제도와 비슷한 단가제도(檀家制度)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췄으며 불교와 쇼군 가문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점도 신불분리령의 배경이었다. 결국 신정부의 의도대로 신불분리령은 불교의 힘을 약화시켰다. 불교가 맡아온 국왕의 장례의식도 신도로 넘어갔다.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신도의 득세는 제국주의와 맞물리며 광기 어린 침략과 압제ㆍ학살로 이어졌다. 종전 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이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이 신도와 정치의 분리라는 사실은 국가 종교로서 신도의 폐해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시공간을 떠나 권력과 종교의 과도한 유착 또는 긴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를 그르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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