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2월 17일] 하나의 판결문이 나오기까지…

최근 형사단독 재판부에서 내린 판결문 몇 건이 화제가 되자 법원에 대한 볼멘소리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많은 국민을 가장 놀라게 한 건 판결문이 나오기까지 법원에서 그 사건의 기록과 판결문 초안을 읽은 사람은 담당 단독판사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 아닌가 싶다. 나는 미국연방항소법원에서 일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거기서는 판사는 물론 법원소속 법조인 전체의 손을 거쳐야만 판결문이 나올 수 있었다. 연방항소법원에서 사건 하나는 세 명의 연방판사에게 배당된다. 판사와 그의 소속된 클럭 세명이 기록을 읽으니 한 사건당 모두 열두명이 사건을 검토하는 셈이다. 각 판사실에서는 주심을 맡은 클럭이 토론을 위해 사실관계와 1심판결, 주요 쟁점, 선례와 법, 추가질문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 판단 등을 정리한다. 재판 전주가 되면 각 방마다 판사와 세명의 클럭이 사건을 놓고 회의를 한다. 재판을 마친 후 각자 똑같은 과정을 거친 세 판사는 모여 결론을 협의한다. 세명의 의견이 다를 때는 다수의견을 낸 판사 중 연장자가 판결문을 쓸 판사를 결정한다. 판결문을 쓰기로 한 판사의 주심 클럭은 판결문 초안을 작성한다. 초안이 되면 우선 그 방의 클럭들과 판사가 읽고 고친다. 그 뒤 다른 두명의 판사와 휘하 여섯명의 클럭이 초안을 점검한다. 우리 판사의 맘에 든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다른 두 판사가 고치라고 하면 이를 조율하기 위해 초안 담당 클럭은 혼쭐이 난다. 치열하게 의견이 오가는 사이에 판결문은 다듬어진다. 실제 자기 손으로 타이핑만 안했다 뿐이지 세명의 판사 모두 자신의 이름을 연명으로 서명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문이 나온다. 이렇게 나온 판결문 초안은 그대로 발표되지 못하고 일주일 동안 법원의 판사와 클럭ㆍ인턴 모두에게 공람해야 한다. 기록을 직접 읽은 사람들은 아니기에 판결문 자체로 이상한 것, 선례나 법을 잘못 인용한 것, 하다못해 오타까지도 담당 클럭에게 e메일로 수정의견을 보내게 돼 있다. 관심 사건일수록 온 사방에서 들러붙어 읽는다. 나 역시 밤을 새고 초안을 쓴 후 곧 법대 교수가 될 클럭에게 검토를 받았음에도 고칠 게 있다는 e메일을 열 건 넘게 받고 얼굴이 화끈거렸던 적이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성,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함.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갖춰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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