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정벌레를 뒤집으면 말랑말랑한 속이 나오듯이 그동안 써온 산문은 딱정벌레의 딱딱한 껍질이고, 그동안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던 시적 언어는 바로 알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령(75ㆍ사진)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가 30일 생애 첫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문학세계사 펴냄)’를 내고 마련한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소감을 밝혔다. 소설ㆍ희곡ㆍ시나리오ㆍ문화평론 등 장르를 넘나들며 글을 써온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 교토 일본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1년간 혈혈단신으로 지내면서부터다. 그는 “젊은 사람들도 하기 힘든 자취생활을 하는 동안 절대 고독 속에서 마치 감기에 걸려 참을 수 없이 기침이 터져나오듯 내 피부에서 시가 쏟아져나왔다”며 “평생의 지적 오만과 서울의 편했던 삶으로 인한 나태함을 고백하듯 적어내려간 한 지식인의 독백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간 쓴 산문이 은유적이고 수사학적 문구가 많아 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여기 실린 시는 되레 무디고 가죽같이 뻣뻣한 언어로 썼다”며 “그러나 속은 센티멘털하다”고 말했다. 신 없이 살아가지만 역성을 들어주면 금방이라도 울 것같이 외롭고 고독한 현대인에게 바치는 간절한 응원가이자 찬미가인 표제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자고 일어나 베갯잇에 수북이 빠진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나이든 노인의 절박한 심정을 그린 ‘혼자 누운 날’ 등을 통해 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년배와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은 글이라 전혀 팔리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가 상품이 되지 않는 이 시대에 100만권 이상 팔려 출판시장을 뒤엎어놓을 만한 유쾌한 반란이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책은 ‘포도밭에서 일할 때’ ‘혼자서 읽는 자서전’ ‘시인의 사계절’ ‘눈물이 무지개가 된다고 하더니’ ‘내일은 없어도’ 등 다섯 개 소주제로 나눠 61편의 시를 담았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한 시는 그동안 학자로 연구해왔던 시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일본에서의 외로웠던 시절에 쏟아낸 말은 산문이나 에세이로 도무지 표현이 되지 않아 쓴 것으로 ‘시적 영감(poesy)’이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쓰고 싶어하는 ‘시(poem)’는 아니다. 인터넷에서 쓰는 함축적인 언어를 동원하고 산문 같은 방식으로 써 너무나 실험적이라 죽은 후에나 발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인터넷에서 범용되는 언어가 언젠가는 시적 언어가 될 것이다.” 일본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그에게 최근 벌어진 독도 문제에 관해 물었다. 그는 “독도영유권 주장은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라 한ㆍ중ㆍ일 삼국의 균형을 깨는 것”이라며 “일본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일본에는 지성이 없는가를 되물어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거 중국이 수천년간 아시아의 패권을 노린 것처럼 일본이 행동한다면 한국은 물론 일본의 희생도 불가피하다”며 “한ㆍ중ㆍ일 3국이 각자의 장점을 살려 네트워크 국가를 만들어야만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