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27일] 전함 포템킨, 쇠고기


코사크 기병대의 칼을 맞고 쓰러진 엄마의 손을 떠난 유모차는 아기의 울부짖음 속에 계단을 굴렀다. 현대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전함 포템킨’의 한 장면이다. 전함 포템킨의 반란은 20세기의 역사에도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재정 러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전함인 포템킨호에서 왜 반란이 일어났을까. 급식에 불만을 품은 수병들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1905년 6월27일 오후 1시 흑해, 포템킨호 후방 갑판. 급식을 거부하면 처형하겠다던 부함장이 수병 한 명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반격에 나서 수병들은 함장을 포함한 장교 18명중 8명을 죽이고 배를 장악, 오데사 항구로 배를 돌렸다. 죽은 동료의 장례식을 치르고 석탄과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다. 오데사의 시민들은 포템킨호의 입항에 환성을 질렀다. 인구 40만명 중 30만명이 차르체제에 저항하는 시위에 나서던 상황에서 해군을 구원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 시간에 50톤의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포템킨의 위력에는 고사크 기병대도 떨었다. 흑해함대의 다른 전함의 수병들도 포템킨호와 전투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에 합류했다. 전함 포템킨의 결말은 실패. 시민들을 구한다며 어렵게 발사한 함포는 목표를 빗나갔다. 우군으로 합류했던 다른 전함도 좌초하자 수병들은 배를 몰고 루마니아로 도망쳤다. 차르는 안도했으나 포템킨호가 퍼뜨린 혁명의 씨앗은 1917년 공산혁명으로 이어졌다. 사건의 시발점은 부패한 쇠고기. 구더기가 꼬인 쇠고기를 먹지 않겠다던 수병들의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선상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장과 수석군의관의 가벼운 언행도 화를 불렀다. 썩은 쇠고기에 항의하던 수병들에게 수석군의관은 이렇게 답했었다. ‘이건 좋은 고기야, 아무런 문제 없어. 식초로 씻어내기만 하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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