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건협 50주년/“경제성장의 효자” 신화창조

◎수출·건설 국민경제 양대축으로 부상/에너지·교통 등 사회간접자본시설 확충/전문화 감리·보수강화 등 질적제고 모색우리 건설업이 1일로 50돌을 맞았다. 인생에 빗대면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세월이니 우리 건설업이 쌓아온 역사의 두께를 실감케 한다. 우리 건설업은 일제의 수탈과 해방, 분단과 전쟁의 정치·경제적 혼란기 속에서 움텄다. 삽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무의 상태에서 오늘의 눈부신 성장을 일궈낸 것이다. 건설인들 스스로가 「신화」라고 표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건설업은 우리 경제의 「효자」였다. 건설업은 국토의 개발과 산업화 과정에서 이 땅 구석구석에 발자취를 남겼다. 더불어 우리 민족의 근면성과 창의력을 통해 이국의 땅에도 하나의 역사를 남겼다. 때문에 건설업이 우리 경제를 이만큼 키워놓은 원동력이었다는 평가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건설업 50년사는 곧 대한건설협회의 발자취와 맥을 같이 한다. 대한건협이 창립된 47년 5월1일을 기점으로 우리 건설업의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건설업은 기로에 서 있다. 시장개방의 파고는 건설업에도 여지없이 몰아닥쳤다. 무한 경쟁의 시대는 우리 건설업계에 일대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건설업이 걸어온 지난 5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더 나은 50년을 위해 나아갈 바를 진단한다. ◇여명기(1945∼1957) 해방 후의 건설산업은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민족자본이 전무했다. 자재·기술자·장비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토건회사 소속의 기술자, 관리인이나 하청업자들이 그 업체의 대표로 새 출발, 초창기의 건설산업을 주도했다. 이들은 소규모 건조물이나 공공시설공사를 수행하는 「보수공사 도급시대」를 열었다. 해방 당시 서울에 소재지를 둔 건설업체는 170여개사에 불과했으나 47년에는 3천여개사로 늘어났다. 이어 경제부흥 5개년계획이 수립됐고 국가건설사업 실행예산과 외국 원조자금을 합쳐 총예산의 25%규모인 500억원이 건설산업에 투입됐다. 51년 부산에서 한국토건협회가 창설됐으며 이는 대한건설협회의 모태가 됐다. 일제의 잔재를 비로소 털어버린 업계는 휴전 이후 전후 복구와 도시재건 등 「국가재건사업」을 맡게 되면서 건설업의 르네상스시대를 열었다. ◇정비기(1958∼1961) 정부는 건설회사들이 독자적인 공사수행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 직접 시공에 개입하는 교도형 계약방식을 도입했다. 즉, 소요자재를 관급하고 장비도 정부중기사업소에서 조달하고 시공방법이나 사용장비를 단가내역서에 명기하도록 한 것이다. 정부는 이어 58년, 건설업계의 체제정비와 업계의 보호육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건설업법을 제정했다. 이 제도는 1년 뒤 등급제면허제도로 대치되었으며 59년 5월 등급제에 의해 1천3백28명의 업자가 우리나라 건설업법상 최초로 면허제 건설업자로 탄생됐다. 이어 61년 군사정부는 건설부를 신설하고 국토건설국을 두어 국토건설사업을 관장토록 했다. 건설업이 제도적으로 모양을 갖춘 시기였다. ◇도약기(1962∼1972) 국토개발 등이 본격화해 우리 경제사에 일대 전환기를 이룬 시기로, 산업사회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경제·사회의 안정기반을 구축하였으며 수출과 건설이 우리 국민경제의 양대 축으로 떠올랐다. 이 기간에는 ▲전력 개발 ▲농토의 확장과 관개 ▲지하자원의 개발 ▲도로·교량 건설 ▲다목적댐 건설 ▲공단 조성 ▲주택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및 기반시설 확충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해외건설도 이 시기에 태동했다. 65년 현대건설이 태국이 파타니­니라티왓 고속도로공사를 수주함으로써 우리 해외건설의 막이 올랐다. 우리 건설업은 이 기간에 질적·양적으로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 1, 2차 경제개발계획기간중 방대한 기반시설의 건설이 집중됨으로써 건설업이 경제개발의 선도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공단 개발, 댐건설, 고속도로 건설 등으로 건설기술의 급격한 향상을 가져왔다. 이는 70년대 이후 본질적인 해외건설진출을 가능토록 한 원동력이 되었다. ◇성장기(1973∼1982) 1, 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정부의 건설시책은 국토공간의 효율적 구조개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3차계획(72∼76)기간은 60년대의 건설업 신장을 바탕으로 기술과 경험을 쌓는 기간이었다. 73년 사우디 도로건설공사 수주를 계기로 중동 진출을 본격화했다. 해외건설 수출은 73년과 78년의 석유파동을 이겨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3년 이후 GNP가 연평균 10.8%의 증가를 이룩한 데 비해 건설산업이 16.4%의 고성장을 기록한 데는 해외건설 수출의 힘이 컸다. ◇성숙기(1982∼1991) 78년부터 시작된 2차 석유파동으로 온 세계가 불황에 허덕였다. 국내 경제도 침체됐으며 건설수요도 국내외적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특히 중동 산유국의 해외건설 퇴조와 걸프전으로 인해 해외건설진출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의 대응책이 필요하게 됐다. 해외의 건설환경은 날로 악화했지만 국내 공사물량이 꾸준히 늘어나 건설업은 성숙기를 맞이했다. 에너지·교통·통신·국토개발사업 등 대규모 사회간접자본시설 확충공사가 진행됐다. 이 기간에 가장 주목할 부문은 주택 건설이다. 공업화 추진에 따른 인구의 대도시 집중과 핵가족화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량의 주택수요를 유발했다. 4∼6차 경제개발계획기간동안 전국에 3백30여만호가 건설됐다. 그러나 이 실적은 공공부문공사에 의한 것이었다. 정부는 10년 남짓 민간주택건설이 부진해 집값 폭등이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주택건설정책을 일대 전환했다. 분당·일산 등 5대 신도시개발을 포함한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한 것이다. 신도시 건설은 단기적으로 집값의 안정세를 가져오는 긍정적 측면이 있었으나 수도권의 기형적인 개발과 교통난 심화 등 적잖은 부작용을 낳았다. ◇구조조정기(1992∼현재) 주택건설 2백만호 건설에서 비롯된 건설경기의 과열은 91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인력·자재 부족, 자재값 상승 등 갖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에 정부는 91년 건축규제조치와 건설경기 진정책을 내놓았다. 우루과이라운드로 인한 국내 건설시장의 개방은 건설업계에 일대 혁신을 요구했다. 건설업의 체질 및 경쟁력 강화가 절실한 과제로 떠올랐다. 건설업도 제조업 분야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구조조정기에 접어든 것이다. 건설업은 이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수준 제고로 그 발전방향이 바뀌고 있다. 정부의 시책도 경영합리화와 기술수준 제고로 서서히 변하고 있다. 전문화가 촉진되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도 종속관계에서 협력관계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대형업체들은 단순 시공에서 벗어나 감리, 유지보수 등 부가가치가 높은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플랜트 건설에서도 노하우를 축적하면서 자본·기술·경영능력 향상에 주안점을 둔 기업구조개선에 전력을 쏟고 있다. □특별취재팀 성종수 유찬희 한기석 정두환 이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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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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