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정부의 요청을 받고 단번에 채권시장안정펀드에 동참하기로 한 것은 금융시장 불안을 방치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그동안 금리인하와 은행채 매입 조치 등으로 시중금리를 낮추고 단기채권시장의 숨통은 터놓았는데 자칫 채권안정펀드에 대한 우려가 확산될 경우 두마리 토끼는 물론 ▦회사채 시장 경색에 따른 기업 자금난 악화 ▦이로 인한 채권형펀드 펀드런 등 세마리, 네마리 토끼까지 모두 놓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때마침 시중금리를 낮추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특명까지 나와 발권력을 동원한 한은의 과감한 유동성 지원 방안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 왜 한은에 SOS 요청했나=금융위가 한은에 채권안정펀드에 대해 SOS를 타전한 것은 금융시장이 당초 기대했던 상황과 정반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지난 13일 10조원 규모의 채권안정펀드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발표 당일 오전만 해도 하락했던 금리는 대책이 발표되자마자 국고채 3년물의 경우 0.30%포인트나 급등했다. 다음날에도 0.16%포인트 뛰었고 18일도 0.13%포인트나 급등하며 5.35%대로 치솟았다. 채권안정펀드 대책이 ‘채권시장 불안정펀드’로 작용한 것이다. 채권시장이 정부 대책을 약이 아닌 독으로 받아들인 것은 자금조성을 금융권에만 맡겼기 때문이다. 한은이나 정부 재정의 지원 없이 은행ㆍ보험ㆍ연기금 등이 갹출하도록 한 것. 즉 가뜩이나 돈 없는 금융기관들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보유한 국채나 공사채ㆍ회사채 등을 팔 수밖에 없고 채권매수 여력도 줄어들 것이 뻔해 외국인 등 투자자들이 일제히 채권 투매에 나선 것이다. ◇한은 어떤 카드 내놓을까=금융위의 요청을 받은 한은은 현재 실무진에서 채권안정펀드 지원 방식과 규모ㆍ시기 등에 대해 다양한 검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금융위 요청과 관계없이 이미 한은 내부에서 구체적인 검토는 사실상 다 끝마친 상태”라며 “효과를 극대화할 시기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한은이 내놓을 카드로는 우회적인 유동성 지원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일단 한은법상 직접 펀드 출자는 불가능하다. 또한 은행권에 직접 대출하는 방식은 신인도 문제로 은행이 꺼려 활용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결국 한은이 은행권에 간접적으로 자금을 대주고 이를 토대로 은행이 펀드 조성에 적극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자금지원은 은행이 보유 중인 국고채를 직매입하는 방안이 가장 일반적이다. 또한 한은이 발행한 통안증권을 중도상환하는 방법도 보편적이다. 또 환매조건부채권(RP) 방식으로 은행채 등 기타 채권을 매입하는 수단도 가능하다. 규모는 우선 10조원 이내에서 지원될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수십조원을 지원하기보다는 단계별로 2차ㆍ3차로 증액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회사채시장 규모를 감안하면 1999년 대우채 사태 당시(30조원) 수준은 돼야 한다는 게 시장의 대체적인 견해다. ◇정책 공조 속도내나=13일 금융위의 채권안정펀드 대책에 대해 당초 한은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현 금융시장이 대우채 사태 당시와는 다르고 시장상황도 급박하지 않은데다 자본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다는 판단 때문이다. 특히 사전에 충분한 논의 없이 서둘러 발표해 시장의 혼란만 가중시킨 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이번 대책처럼 좋은 호재를 금융위의 헛발질로 망쳐버린 점이 안타깝다”며 “이 때문에 한은이 서둘러 2조원의 국고채 직매입에 나서는 등 쓰지 않아도 될 비용이 낭비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다 그동안 언론플레이를 통해 한은을 압박했던 금융위가 자세를 낮추는 바람에 한은과의 공조는 별 잡음 없이 원활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의 한 고위관계자 또한 “현재 자금조성 등을 위해 한은과 협의 중”이라면서 “ 결국 한은의 의사결정에 따라 채권안정펀드가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할지 결정될 것”이라며 한은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