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전산장애 사고가 발생한 지 8일째인 19일. 농협중앙회는 2차 브리핑을 통해 "카드업무의 97%가 복구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거래내역 등은 아직 복구가 안돼 시스템의 완전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 주변에서는 "농협이 이번 사태를 다루면서 보여준 끊임없는 '축소ㆍ은폐 시도', 최원병 농협중앙회장 등 최고 경영진이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관리 능력에 대한 의구심 등을 어떻게 떨쳐내느냐가 농협의 새로운 숙제"라며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내년 3월 농협사업구조개편(신ㆍ경분리)을 앞두고 정부가 농협에 상당금액을 지원하기로 한 바 있어 농협의 뼈를 깎는 개선노력이 담보되지 않는 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국민들의 세금만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전산망 마비 "혈세가 샌다"=정부는 올해 초 농협구조개편에 필요한 자본지원을 위해 농림수산식품부와 기획재정부 등 관계기관협의체를 구성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예산 계획서를 만들어 내년 예산안에 반영할 방침이다. 아울러 정부는 사업구조개편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세금 8,000억원이 면제되도록 하기 위해 조세특례제한법 개정도 검토하고 있다. 농협 사업구조개편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세금이 투입되는 것이다.
이날 2차 브리핑에서 농협은 "내년 3월에 있을 사업구조개편과 이번 전산 사태는 별개"라며 선을 그었다. 사업구조개편을 통해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전문성을 더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농협 측의 답에도 고객과 시장에서는 "내부통제에 구멍이 난 농협이 정상적으로 사업구조개편에 성공할 수 있겠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다. 사업구조개편 전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전산망 마비 사태로 사업구조개편이 아닌 농협의 사고 뒷수습에 혈세가 낭비될 수 있다"며 "근본적인 변화 없이 경쟁력도 갖추지 못한 채 정부의 지원금이 투입된다면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협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매년 횡령 등 금융사고가 줄지 않고 있는데다 내부통제를 강화할 만한 적절한 장치들이 마련돼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지주가 출범하더라도 정보기술(IT) 본부는 중앙회에 남을 예정이어서 제2의 전산망 마비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농협은 "농협법상으로는 3년까지 현행체제로 간다고 돼 있다"며 "전산 분리에는 많은 돈이 들고 단계적으로 시간 두고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실종된 리더십 '도마 위'=이날 전국농협노조는 농협중앙회 중앙본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최 회장의 사퇴와 지역 농ㆍ축협 신용사업 부문의 별도 독립전산망 구축 등을 요구했다.
노조는 "농협 전산장애로 3,000만명에 달하는 고객과 농민 조합원 및 농ㆍ축협이 손실을 입었다"며 "경영진의 위기관리 부재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고 최 회장의 사퇴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산망 마비 사태 발생 이후 최 회장을 비롯한 농협중앙회 경영진의 안이한 태도에 대해 따가운 질책이 이어지고 있다. 압권은 지난 14일 대국민사과 기자회견 이후 최 회장의 '책임회피적'행보다.
최 회장은 간담회에서 "사고가 난 뒤 내용을 곧바로 보고받지 못했다"며 "나도 (직원들이 정보를 안 줘서) 기자들처럼 당했다"고 답했다. 농협도 농협이지만 최고경영자가 제대로 된 보고조차 못 받는 것은 최 회장의 조직장악력에도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다.
기자회견 당시 '대국민 사과'에서도 관료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다. 최 회장은 수십명의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산시스템 담당 부장에게 "속이지 말고 확실하게 해. 거짓말 하면 의혹만 커져"라며 호통을 쳤다.
이 자리에 있던 정태민 IT 본부분사 부장은 최 회장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거짓말한 것 없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큰소리로 답했다.
최 회장은 사건 발생 이후 단 한 차례 사과회견을 한 후 모든 브리핑을 이재관 농협 중앙회 전무에게 맡겼다. 현재 공식적인 활동을 모두 중단한 채 사태 추이만을 보고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도 "비상임이어서 업무를 잘 모르고 자신이 한 것도 없으니 책임질 것도 없다"고 말해 파문이 일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정태영 현대캐피탈 사장이 사태 수습을 진두지휘하는 모습과 너무도 대비된다"며 최 회장의 행보를 비판했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자산 190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로서 해서는 안될 무책임한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며 "그동안 농협비리로 역대 회장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자 회장직을 아예 비상근직으로 바뀌었는데 제도적으로 회장에게 실권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사불란한 리더십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최 회장은 올 12월 임기 4년의 농협중앙회 회장 재선에 도전할 계획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