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창간40돌 특집.해외전문가에 듣는다] 에드워드 M.그레이엄

[해외전문가에 듣는다②] 에드워드 M.그레이엄"한국재벌 투명성 제고·계열금융 분리를" 외국인들에게는 20세기 막판의 한국경제의 모습이 매우 놀랄만한 일이었다. 우선 1997년말에 한국은 아시아 금융위기와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불황에 빠져들었다. 한국은 2차대전후 개도국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한 첫번째 국가로서 30년간 고성장을 지속해왔다. 경제적 발전과 동시에 한국은 독재국가에서 민주주의가 번성하는 나라로 정치적으로도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두가지 변모 모두 순탄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같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나라는 어떤 형식으로든 후퇴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는 97년의 위기이전에도 소위 「성장형 불황」을 여러차례 겪었었다. 그러나 97~98년의 불황은 그전의 불황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더구나 97년 이전에 사실 어떤 전문가도 한국에서 그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고 나아가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그정도라고 인식한 전문가도 전혀 없었다. 또 불황이 닥쳤을 때 많은 비관론자들은 한국이 어려움을 극복해내는데 수년 심지어 수십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두번째 놀랄만한 일은 당연히 한국 경제회복의 빠른 속도다. 98년의 마이너스 6%성장에서 99년에 10%를 넘는 고성장으로 탈출해 금융위기 이전의 국내총생산(GDP) 수준을 회복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98년의 불황이나 그후의 경제회복 모두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세계은행 부총재였던 조셉 스티글리츠나 서울대학교의 표학길교수 등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IMF가 구제금융 조건으로 한국에 요구했던 정책들은 부적절한 것이었고 98년의 불황을 한층 악화시킨 것이었다. IMF의 요구에 따른 고금리는 많은 회사들, 심지어 건전한 회사들까지 파산으로 몰아넣었고, IMF 하의 재정정책은 한국경제의 「자연스런 안전판」을 잘라내버렸다. 물론 IMF의 조건이 달라졌더라도 98년의 불황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다만 IMF가 불황의 정도를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IMF가 위기를 불러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IMF가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비판론자들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98년의 불황은 훨씬 약했을 것이다. 한국의 위기를 불러온 것은 근본적으로 볼 때 기업들의 과잉투자다. 투자자들에게 원금을 되돌려줄 전망도 없고 채권자에게 제대로 원리금을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망성이 없는 행동였다. 채권자들, 특히 해외 채권자들이 과잉투자의 심각성을 깨닫고 추가 융자(단기채무의 연장을 포함해)를 거부하면서 97년의 위기가 터진 것이다. 해외채권자들의 부채상환 요구가 한국 외환보유고의 고갈과 원화의 대폭 평가절하로 이어진 것이다. 신용위축은 생산위축으로, 이어서 불황으로 연결되었다. 이율배반적으로 평가절하된 원화와 문제의 과잉투자가 한국경제의 급속 회복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금융위기를 맞은 다른 아시아국가들과 달리 90년대 한국의 과잉투자는 외국에 수출할 수 있는 상품분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화의 평가절하에 따라 한국상품의 경쟁력이 높아진데다 과잉투자로 인해 생산량을 한껏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연히도 한국의 교역상대국, 특히 미국의 경기가 매우 좋았다. 이 때문에 97년에는 공급과잉이었던 상품들이 2년후에는 적정수준 내지 공급부족상태가 되면서 가격까지 오르는 상황이었다. 반도체가 좋은 예다. 경제회복이 대부분 수출증가에 힘입은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공공지출의 확대도 경제회복에 도움을 줬다. 가계소비 증가, 재고축적도 99년의 경제회복에 큰 요인이었지만 이는 98년의 위축에 따른 반작용이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2000년의 성장률은 99년보다 낮아질 것이고 2001년에는 더 낮아질 것이다. 그러나 다시 불황이 나타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빠른 회복세에도 불구, 금융위기와 불황의 과정에서 한국경제의 약점이 숱하게 드러났다. 한국경제가 이들 약점을 치유하지 못할 경우 장기적으로 성장세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현재의 주된 관심사는 이들 약점이 개선되느냐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전문가들은 금융구조조정 등 구조개선이 제 방향을 잡아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아직 미흡한 부분중에서도 가장 먼저 지적되는게 바로 재벌 개혁이다. 재벌개혁에 관한 논의는 두가지 사실 때문에 복잡해진다. 첫번째는 재벌 비판론자들이 싫어할 얘기일지 모르지만, 재벌이 지난 30년간 한국경제 고성장의 주역이었다는 점이다. 재벌계열 회사들이 세계적인 규모의 활동을 펼치고 있고,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경영능력도 일반적으로 볼 때 우수한 편이다.(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금융위기 당시에도 서구 언론에서 가장 경영이 뛰어난 회사로 선정될 정도였다) 재벌은 또 금융위기후 경제회복에서도 당연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심지어 해체된 대우그룹조차 세계적인 규모로 영업을 해왔다. 세계 주요 자동차회사들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려고 애쓰는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나는 97년 서울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있을 때(금융위기가 시작될 무렵에 한국을 떠났다) 대우자동차의 품질에 감명을 받았었다. 외국 투자자들은 이같은 대우자동차의 품질과 수많은 신흥시장에 깔려있는 대우의 판매 네트워크의 강점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 사실은 재벌 옹호론자들이 싫어할 점이다. 재벌의 최고경영진은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있고 실제 경제적으로 애매한 사업에 엄청난 돈을 자주 쏟아부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에는 재벌 최고경영진이 실수를 저지를 때 이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97년 위기의 책임은 재벌이 져야 한다. 재벌들이 장래가 불투명한 사업에 외국 자금을 대규모로 끌어다썼기 때문이다. 대우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재벌들은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자금을 빌렸다. 작년여름까지도 대우의 부채가 490억달러라더니 작년 9월에 실사를 벌인 결과 실제 부채는 730억달러로 늘어났다. ㈜대우가 다른 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운영하던 자금만도 80억달러에 달해 이것만으로도 ㈜대우가 파산할 상황이라는게 이때 발견됐다. 대우의 상황이 가장 나쁜 편에 속할진 몰라도 대우와 비슷한 사례가 적지않다는게 문제다. 재벌들이 이처럼 무분별한 확장에 나설 수 있었던 원인중 하나가 바로 회계기준이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투명성의 결여는 재벌이 신뢰받지 못하는 주요한 이유중 하나다. 하지만 재벌이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는 회계정보의 차원을 넘어선다. 한국에는 재벌들의 경영성과 및 투자계획을 모니터하고 차입금을 어리석게 투자할 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독립된 주요기관이 없는 실정이다. 선진국의 경우 은행뿐 아니라 투자은행, 보험회사, 뮤추얼펀드 등 광의의 금융기관들이 이같은 모니터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자신의 돈이 잘못 쓰이고 있다고 판단되면 즉각 자금을 회수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효율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정부주도 경제개발과정에서 정부가 통제권안에 있는 은행을 통해 이같은 기능을 수행해왔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가 80년대에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규제완화에 나서는 바람에 금융모니터기능을 수행할 대체집단이 없어져 97년의 위기가 발생했다는 논란도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당연히 은행이 대신 모니터기능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미 재벌의 덩치나 능력에 비해 은행은 왜소하고 약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한국의 재벌은 이미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주요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이 때문에 97~98년에 보다 강하고 독립적인 은행의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된 것이다. 현 정부는 이같은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효과적인 금융구조조정을 많이 추진하고 있다. 97년보다 은행 숫자도 많이 줄었고 생존한 은행들의 재무상태도 좋아졌다. 금융개혁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는 아니고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지만 괄목할 정도의 진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함께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할 분야는 비은행 금융기관이다. 이 분야는 상대적으로 거의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재벌 견제를 충분히 해내기 위해서는 은행뿐 아니라 다른 금융기관들도 강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이미 재벌들이 비은행 금융기관을 장악하고 있다. 투자신탁회사, 보험회사, 심지어 뮤추얼펀드까지 재벌산하에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재벌 스스로에게 조차 나쁜 일이다. 예를 들어 비은행금융기관이 강하고 독립적이었다면 대우의 파산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지금 당장 한국에 매우 절실한 두가지 과제가 떠오르게 된다. 첫째는 재벌이 더욱 투명해지도록 계속 압력을 가하는 일이다. 국제기준에 맞는 결합재무제표의 작성 의무화는 제대로 된 주요한 진전이다. 둘째는 금융과 기업의 완전한 분리다. 재벌의 경제력을 효율적으로 견제하려면 이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했듯 한국경제뿐 아니라 재벌 스스로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재벌의 투명성은 이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금융기관이 모니터 및 견제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일이고 한국 정부가 이미 추진하고 있다. 금융과 기업의 분리는 아직 추진되지 않고 있다. 또 매우 힘든 일이다. 사실 경제가 회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재벌과 금융의 분리라는 어려운 과제를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매우 클 것이다. 그러나 금융과 재벌이 분리돼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게 장기적으로 이익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또 금융과 재벌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97년의 위기가 반복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리=이세정 뉴욕특파원 입력시간 2000/08/01 16:28 ◀ 이전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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