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딱딱하게 말하자면 『화폐에 더 이상 영토는 없다』라고 할 수 도 있다. 돈, 화폐는 이제 세계경제전쟁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IMF(국제통화기금) 금융통치라는 미증유의 재난을 겪었던 우리나라 경제도 따지고 보면 화폐의 전쟁에서 패배한 측면도 있다.미국 캘리포니아대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벤저민 J.코헨의 저작 「화폐와 권력」은 열강들의 화폐논리에 좌우되는 우리의 통화주권이 과연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국제 금융자본의 운동논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대신 코헨은 이 책에서 「화폐지리학」(GEOGRAPHY OF MONEY)이라는 새로운 나침반을 제공해준다. 화폐지리학이란 통화관계의 공간적 구조, 즉 통화공간이 무엇에 의해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대한 우리의 정치적·경제적 이미지 체계를 말한다.
그 나침반의 양극엔 바로 국가(정부)와 시장이 있다. 이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세계의 경제지도가 바뀌고 통화의 지형 또한 변화한다.
코헨 교수는 1국1화폐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의 정치지리학을 먼저 더듬어 올라간다. 19세기 국민국가의 발흥과 함께 정착된 1국1화폐체제는 특히 외국의 경제적 간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영토에 제한받았던 화폐가 국경을 넘나들면서 전혀 새로운 성격으로 변했다.
이같은 상황변화에 따라 저자는 「유량중심적 모델」이라는 새로운 분석도구를 찾아낸다. 이는 통화공간을 위치나 장소에 기반한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거래와 관계의 네트워크에 기준한 기능적 개념으로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늘날의 화폐지형은 정치적 국경선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라 각 화폐의 실질적 사용빈도와 그 세력권에 의해 편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통화들 사이에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성립되는데, 저자는 이를 「통합피라미드 모형」이라 부르면서 여기에는 달러와 같은 「최정상 통화」와 이름만 존재하는 「유사통화」에 이르기까지 일곱 개의 층위가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코헨 교수는 통화의 탈영토화가 진행되면서 시장의 거래 네트워크에 의해 창조된 일종의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3차원적 피라미드에 가까운 세계가 오늘날의 화폐지형이라고 분석한다.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소수의 정부들이 있어 다른 국가들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세력을 넓히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결국 민간 시장 주체들이다. 왜냐하면 국가 즉 정부는 세계시장에서 수요자를 확보하기 위해 자국의 화폐를 마케팅하고 경쟁하는 과점적 공급자로 활약하지만 화폐의 수요자 역시 화폐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강력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화폐를 시장 한 복판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코헨 교수의 이 책은 이처럼 화폐지리학이라는 우리로서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통해 오늘날 세계 통화전쟁의 본질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도서출판 시유시 펴냄.
이용웅기자YYO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