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리빙 앤 조이] 얼지 않는 강물처럼 뜨거운 淸朝의 숨결

■ '新 熱河日記' 청더(承德)를 가다<br>베이징서 차로 4시간<br>건륭제 피서산장·독특한 건축양식 외팔묘 등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피서산장 호수구 전경. 피서산장은 1703년 강희제가 처음 만들기 시작해 1792년 건륭제 때 최종 완성을 본 청조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궁전구에서 왕이 기거하며 여름동안 정무를 보았다.


중국의 베이징에서 만리장성을 넘어 동북쪽으로 250㎞ 떨어진 곳에 열하(熱河)라는 도시가 있다. 겨울에도 강이 얼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은 청더(承德)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여전히 열하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조선후기 정조 때인 1780년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 선생이 이곳을 방문한 후 남긴 저서‘열하일기’의 영향 때문이다. 사실 한민족의 역사에 열하라는 도시가 등장하는 것은 연암의 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오늘날 열하가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이유는 연암이 200년전에 밝혔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은 이곳에서 당시 최절정기에 있던 청(淸) 왕조의 통치술을 분석했다. 청조가 역사시대가 시작된 이래 대립적 관계였던 중국과 북방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 열하는 정치ㆍ사회ㆍ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중국이 곧 세계라고 할 수 있던 당시 연암은 열하에서 세계정치의 핵심을 읽었던 것이다. 베이징에서 청더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린다. 자동차와 기차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데 교통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다. 만리장성까지는 그럭저럭 평지다. 만리장성 바로 아래 밀운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물이 부족한 베이징에 용수를 공급하는 귀중한 장소다. 가물었는지 차로 달리면서 언뜻 보일 정도로 말라 있다. 밀운시를 지나면 바로 만리장성이다. 과거 연암 등 당시 조선사신 일행은 이 고산준령을 말을 타거나 걸어서 넘어야 했지만 지금은 산 아래에 터널이 뚤려 있어 순식간에 장성을 통과할 수 있다. 터널을 통해 만리장성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악지대로 들어선다. 험한 산들이 줄지어 버티고 있어 달리는 도로를 방해한다. 특이한 점은 산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장성을 넘고 나서는 보기에도 확연하게 부드러워진다. 산들은 이렇게 한반도로 이어지는 데 장성 남쪽의 중국 산들과는 분명히 다른 만주와 한반도를 생각나게 하는 풍경이다. 청더라는 도시 자체는 산과 산이 맞닿으면서 무열하(武熱河)라는 강이 흐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청더가 역사상 중요한 장소가 된 것은 18세기 청나라 황제들이 이곳에서 4월부터 9월까지 더위를 피하며 한여름을 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더가 가진 관광자원은 이 당시의 유적이 대부분이다. 청더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피서산장(避暑山莊)과 외팔묘(外八廟)다. 피서산장은 1703년 강희제가 처음 만들기 시작해 1792년 건륭제 때 최종 완성을 본 청조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총 면적 584만㎡(약 170만평)에 성벽 길이만도 10㎞에 이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다. 피서산장의 내부는 궁전구ㆍ호수구ㆍ평원구ㆍ산지구로 나뉜다. 궁전구에서 왕이 기거하며 여름동안 정무를 보았다. 피서산장 지역의 경우 분지 안에서도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한여름에도 28도를 넘기는 적이 없다고 한다. 여름 한철 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인 셈이다. 궁전구는 이름 그대로 왕이 기거하며 정무를 돌보던 궁전이다. 피서산장에 처음 도착하면 정문에 쓰여 있는 ‘여정문(麗正門)’이라는 편액이 시선을 잡아끈다. 한자뿐 아니라 몽고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만주어 등이 함께 있어 다른 민족을 배려한 청조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여정문을 지나면 바로 궁전구로 들어선다. 궁전구의 중심은 담박경성전(澹泊敬誠殿)이다. 황제가 업무를 보거나 외국사절단을 접대하는 장소로 쓰였다. 연암 일행이 당시 건륭제를 만난 곳도 이곳이다. 궁전구를 벗어나면 호수구가 펼쳐진다. 호수가 많은 중국 강남 지장성 등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산책 삼아 걸어서 돌아볼 수도 있지만 배를 타고 호수를 돌아보는 맛은 새롭다. 호수를 가로질러 뱃사공이 내려주는 곳에 열하천이 있다. 청더의 옛 지명으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뜻의 열하(熱河)가 유래된 곳이기도 하다. 열하천은 옛날에는 뜨거운 물이 솟는 일종의 온천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물이 고여있는 조금 큰 웅덩이에 불과하다. 이외 평원구는 호수구 북쪽에 있으며 당시에는 황제가 사냥을 하거나 각종 경기대회를 펼치는 곳이었다고 한다. 전체 면적의 80%를 차지하는 산지구에는 봉우리마다 서있는 누각에서 경치를 즐길 수 있다. 피서산장을 나서면 동쪽에서 북쪽으로 산등성이에 8개의 사찰들이 마치 호위무사처럼 둘러서 있다. 원래 12개였다고 하는 데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없어져 현재는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 보령사(普寧寺) 등 8개만 남아있다. 외팔묘의 중요성은 이들 사찰이 중국 한족 양식뿐 아니라 티베트ㆍ몽골인의 종교인 라마교 양식으로도 지어져 있다는데 있다.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면서까지 다른 민족을 끌어안기 위해 각별히 신경 썼던 청조의 노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외팔묘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 수도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을 본떠 만든 것으로 ‘소(小)포탈라궁’으로도 불린다. 따라서 사찰에 들어서면 실제 티베트에 와 있는 듯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피서산장과 외팔묘는 1994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淸은 왜 청더를 건설했을까
새 수도 세워 북방민족 흡수…100년 건설기간 전성기 누려
열하(청더)의 피서산장을 처음 가보면 한 사람이 여름에 쉬기 위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큰 별장을 지은데 대해 놀라게 된다. 1780년 연암과 동행했던 조선 사신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 청조의 정치에서 청더가 차지한 비중과 역할을 생각한다면 달리 판단하는 것도 가능하다. 청더는 청조의 제2수도로서 만주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역사상 중국과 충돌이 그치지 않았던 북방민족과 교류하는 곳이었다. 또 야만족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장성 이남의 중국인들의 불평불만을 누르는 역할도 했다. 피서산장을 처음 건설한 것은 1703년 강희제였다. 청조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로 일컬어지는 강희제는 오삼계 등의 남방 한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중국 내지를 평정하고 곧 바로 북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중국인들처럼 장성을 쌓아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막는다는 소극적 방법 대신 북쪽에 새로운 하나의 수도를 만들어 몽고족 등 북방민족을 아예 흡수하겠다는 생각을 해냈다. 보타종승지묘 등 사원을 대규모로 건설한 것도 티베트 라마교를 종교로 삼고 있는 몽골족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중국 전래의 유교와 불교, 라마교, 이슬람교 등이 어울어져 청더의 문화를 이뤄낸 것이다. 이 생각을 아들 옹정제와 손자 건륭제가 이어받았고 청더의 건설기간인 100년동안 청조는 중국 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원래 이름인 열하의 명칭을 바꾼 것은 옹정제다. 아버지 강희제의 업적을 찬양한다는 이유로 높은 덕을 이어받는다는 뜻의 '청더(承德)'로 개명했다. 청더의 피서산장에 서면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청조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몰락했다는 생각에서다. 청조가 피서산장을 건설할 때의 목표는 자신들 만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북방 유목민족과 남방 농경민족을 융합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 대상이 바뀌었다. 영국과 일본을 위시한 해양 민족들이 침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들과 공존하거나 아니면 아예 물리칠 새로운 사고방식을 생각해낼 황제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 중국은 오랜 세월 열강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한가지 더. 청더가 시원하다고 하지만 이는 피서산장 구역이나 외팔묘 등 산지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산장 밖 일반인들이 주거하는 강가 평지는 분지지형이어서 무척 덥다. 그래서 황제는 '피서산장(避暑山莊)'에 살고 백성은 '열하(熱河)'에 산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더위와 불결, 빈곤함이 당시 피서산장 밖 청더의 세계였다.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보이지 않던 이런 사회 분화현상이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청조도 결국 중국 왕조의 순환논리에 따라 몰락의 길을 걸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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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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