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유럽 재정위기 탈출의 필요조건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주요국의 신용등급을 잇달아 강등했지만 유럽 채권시장은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채금리가 하락하고 신규 국채 발행도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해 12월22일 4,890억유로의 장기 저리자금을 은행권에 공급한 데 이어 이달 말 한차례 더 유동성을 공급할 예정이고, 자금여력을 갖게 된 은행들이 국채매입에 나선 덕분이다. ECB는 그동안 국채매입 확대 요구를 거부하고 회원국 국채를 제한적으로만 매입했지만 최근에는 시장 안정을 위해 국채매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독일 주도로 추진 중인 새로운 재정협약도 위기 해소의 시발점이 됐다.

그리스 2차 구제금융이 첫 관문

정치권의 정책기조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달 말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는 청년실업 해소에 220억유로, 중소기업 금융지원과 인프라 건설 등 경기부양에 820억유로를 투자하기로 했다. 긴축만 강조하던 과거와 달리 유로존 국가들의 고용과 성장에도 역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재정 건전화의 토대를 마련했으니 경제성장을 통해 채무상환 능력을 키우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시장 불안을 해소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우선, 유럽 재정위기의 진앙지이자 뇌관인 그리스의 2차 구제금융에 합의해야 한다. 1,30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는 3월20일 만기 도래하는 145억유로의 국채를 상환하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수밖에 없다. 디폴트 위기를 벗어나려면 민간 채권단이 갖고 있는 2,060억유로에 대한 채무탕감 협상을 타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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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새로운 재정협약의 비준이 필요하다. 지난달 30일 EU 정상회의에서 25개국이 재정적자 감축 의무화를 자국의 헌법에 명시하기로 한 재정협약에 합의했다. 협약은 연간 구조적 적자를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0.5% 이내로 억제하고 위반시 경제적 제재를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3월초 정상회의에서 정식 서명한 후 비준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셋째, 위기 해소를 위한 방화벽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현재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신용등급 강등으로 대출여력이 크게 줄고 AAA 신용등급마저 상실해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유로안정화기구(ESM)의 조기 출범이 불가피하다. 다행히 이번 정상회의에서 ESM을 7월1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ESM은 EFSF와 달리 유로존 국가들이 납입하는 자본금으로 운영되므로 '유럽판 국제통화기금(IMF)'역할을 하게 된다. 출범 자체만으로도 시장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ESM이 예정대로 출범하기 위해서는 유로존 12개국 이상이 비준해야 한다. 이상의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될 경우 유로존은 2~4월의 최대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佛ㆍ그리스 정권교체 땐 꼬일수도

유로존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지만 정치가 변수다. 4월에 치러지는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 정권이 등장할 경우 문제가 복잡해진다. 정치적 색채가 다른 독일과의 정책 조율에 상당한 시간이 낭비되고 갈등이 표출될 경우 시장 불안이 재현될 수도 있다. 다음은 그리스의 정권교체로 인한 불확실성이다. 과도정부의 임기가 끝나는 4월 총선 이후가 문제다. 현재로서는 EU와 IMF의 강도 높은 긴축 요구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신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신민주당이 집권하면 과도정부가 추진해온 긴축정책이 지속될지 불투명하다. 이는 그리스가 여전히 위기의 뇌관이 될 것임을 뜻한다.

이제 유럽 재정위기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출구가 보인다. 하지만 위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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