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5선 연임에 성공한 지 불과 나흘 만에 전격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의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블라터 회장은 자신의 최측근인 FIFA 고위층이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되고 그에 대한 사임 압박이 거세지는 와중에도 지난달 29일(현지시간) FIFA 회장 선거에 출마해 승리를 거뒀으며 당선 후에는 "FIFA의 옛 위상을 되찾는 책임을 맡게 됐다"며 강한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2일(현지시간) FIFA 본부가 있는 스위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블라터 회장은 자신이 회장직을 계속 맡는 데 대해 세계 축구계가 모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고 사임 결정의 배경을 간략하게 밝혔다. 하지만 17년간 그가 이끌어 온 FIFA의 유례없는 부패 스캔들로 이미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은 그가 이제 와서 도덕적 이유로 물러났다고 믿는 이는 드물다.
현재 가장 유력한 배경으로 지목되는 것은 이날 블라터 회장의 오른팔인 제롬 발크 사무총장이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개최지 선정용 뇌물자금으로 지목된 1,000만달러의 송금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서한이 공개됐다는 점이다. 발크 사무총장이 송금과 무관하다고 밝혀온 FIFA의 공식 해명과 배치되는 증거가 나오면서 블라터 회장의 심리적 압박이 커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디펜던트 등은 몰레피 올리판트 남아공축구협회장이 지난 2008년 3월4일 발크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남아공월드컵 조직위원회에 지원할 자금 1,000만달러를 잭 워너 당시 북중미카리브해축구연맹(CONCACAF) 회장의 관리 계좌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올리판트 협회장도 이 서한이 위조된 것이 아닌 공식 문서임을 확인했다.
ABC방송 등 미국 언론들도 이날 일제히 미 FBI와 연방검찰이 블라터 회장을 수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ABC방송은 이날 복수의 익명 취재원의 말을 인용, FBI와 연방검찰이 사의를 표명한 블라터 회장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으며 FBI가 부패 혐의로 체포된 이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면 이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기 위해 블라터가 연루됐다는 사실을 서로 먼저 불려고 할 것이라고 전했다. FBI는 FIFA를 부패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는 기존의 발표 이외에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수사당국이 블라터 회장의 부패 관련 단서를 포착한 것이 그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 그레그 다이크 회장은 블라터 회장의 사임과 관련해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도덕적 이유로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 지난주에 사임했어야 한다"며 "선거가 치러진 지난달 29일부터 그가 사임한 나흘 동안 어떤 종류의 결정적 단서가 그의 심경을 바꾸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뒤 사의를 표명한 데 대해 블라터 회장이 FIFA 조직 내에서 자신의 적대 세력을 축출하고 후계 구도를 굳힐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가디언지는 "선거 나흘 뒤에 사의를 밝힘으로써 그는 앞으로 6~9개월 동안 자신이 고른 후계자에게 조직을 넘겨주고 원할 때 떠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다"며 "다만 FBI가 그에게 그런 권한을 허락할지는 미지수"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