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4일] <1500> 매카트니 사건


청나라 조정에 비상이 걸렸다. 영국 특사 매카트니(George Macartney)가 건륭제에 대한 삼고구배(三叩九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삼고구배란 머리를 세 번 땅에 찧고 아홉 벌 절하는 만주족의 인사방식.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 때도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인조가 삼고구배를 했다. 속이 탄 청국 관리들은 건륭제의 의자 뒤에 영국왕 조지3세의 초상화를 거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매카트니는 꿈적도 안 했다. 결국 수 차례 연기된 접견이 열하의 별궁에서 이뤄진 1793년 9월14일, 매카트니는 왼쪽 무릎을 굽혔을 뿐이다. 청은 '천자의 80세 생일잔치를 망쳤다'며 분노했고 매카트니는 통상관계 수립이라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영국이 애써 마련한 증기엔진과 면방기, 직포기와 시계, 대포와 소총, 허셀 망원경, 진동방지 장치가 부착된 마차 등 선물을 건륭제가 살펴볼 기회도 사라졌다. 건륭제는 영국 왕의 국서에 '중국은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교역도 필요없다. 그대의 충성심을 알았으니 일부러 사신을 먼 길로 보낼 필요도 없다'는 답신을 보냈다. 매카트니 사건은 비밀로 분류됐으나 수행원들의 입을 통해 유럽 사회에 퍼졌다. 매카트니 사절단이 5개월여 동안의 중국체류 경험은 '차와 도자기ㆍ비단으로 유럽의 금과 은을 쓸어가는 부국'이라는 환상을 깨뜨리고 '정체된 종이호랑이'라는 인식을 심으며 침략의 씨앗을 뿌렸다. 매카트니보다 13년 앞서 건륭제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한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감탄한 선진문물의 중국이 유럽인들의 눈에는 '낙후된 침략 대상'으로 여겨진 것이다. 동서양 교류사의 변곡점이었던 매카트니 사건 216년이 흐른 오늘날, 중국은 다시금 세계의 달러와 원자재를 빨아들이고 있다. 새로운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까.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