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20. 1975년 8월, 당좌를 트다

1975년 8월 생애 첫 30만원짜리 적금을 들 때부터 거래해왔던 신탁은행 종로지점에서 당좌를 개설했다. 나의 이름으로 어음과 당좌수표를 발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음과 당좌수표는 생각하기에 따라 그 자체가 빚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현금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현찰이 없더라도 책을 내는 데 문제가 없었고, 나를 바라보는 거래처의 시각도 한층 신뢰감을 얻을 수 있게 됐다. 당시 단행본 출판사 사정으로 당좌거래를 할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8월 중순에는 영업사원 한 명을 채용해 배본과 수금을 맡겼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난 후 자금흐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확인해보니 일부 수금액을 유용한 것이었다. 그는 군 특수부대 출신이었는데 첩보대 출신들은 취업이 잘 되지 않아 결혼을 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상당수는 생활고까지 겪는다고 했다.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료였기에 사회에 나와서도 의리가 강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군대시절 같이 근무했던 몇몇 동료들이 그나마 직장생활을 하는 그에게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보기가 너무 안타까워 짐이라도 끌어 밥벌이라도 하라고 리어카를 사 줬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마음대로 공금을 유용한 직원과 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3개월 여 만에 퇴사했고 유용한 자금을 변상할 능력이 없다고 말해 더 이상 종용하지 않았다. 간혹 전화가 오곤 했지만 일본에 돈 벌러 간다고 한 후에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서점의 전화주문이 늘어났다. 책을 주고 사무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다시 주문하는 곳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영업부를 만들기로 하고 사람을 물색했다. 마침 다른 출판사 사장의 소개로 이태주씨를 알게 되어 영업부장으로 영입한 후 그 밑으로 사원을 붙여 주었다. 책이 귀했던 당시에 학생들은 교과서 표지를 다른 종이로 정성껏 포장해 다녔다. 서점에서도 책을 사면 표지를 별도로 포장해 주는 것이 상례였고 대형서점의 경우 독자적으로 포장지를 제작, 홍보를 병행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지방서점은 밋밋한 흰 종이나 그림이 조잡한 포장지로 싸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이것을 눈여겨보다가 디자인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분위기 있는 그림을 곁들인 고급스런 포장지를 만들어 전국 20여 곳의 서점에 고유이름을 새겨 보내 주었다. 종이값과 인쇄비는 서점에서, 운송비는 서비스 차원에서 내가 부담했는데 80년 초까지 이어졌다. 간혹 지방서점 사장들이 명함을 부탁해도 만들어 보내줬다. 세계명작 그림책을 출간한 후에는 `색칠하기`를 여러 권 만들었다. 내용은 명작 그림책을 토대로 했는데, 그림책 제작에 남다른 애정을 쏟은 것은 그림책이야말로 어린이들에게 창의력과 상상력을 높여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발췌해 색칠하기를 여러 권 만들 때였다. 그 책은 한 가지 색상으로 인쇄하면 됐지만 촬영을 하고 음화필름이 나오면 다시 양화로 바꾼 뒤에야 제판을 했다. 당시 제판용 필름은 100% 수입을 했기 때문에 매우 비쌌다. 나는 필름 값을 절약할 마음으로 음화 필름으로 인쇄를 했다. 실제 음화 제판을 해보니 인쇄에 별 문제가 없어 양화 필름 값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 후 투명한 아스테이지에 그림을 직접 그리면 양화상태가 되어 필름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아스테이지를 구입한 후 화가를 찾아가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 후 인쇄를 했는데 예상대로 상태가 매우 좋았다. 이 아이디어로 촬영비와 필름 값을 크게 절감할 수 있어 제작비를 낮추는데 결정적인 보탬이 됐다. 사진 제판실 직원들은 “아스테이지를 이용하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획기적인 시도”라면서 놀라워 했다. 당시 필름 값은 원고료보다도 비싸 제작자 입장에서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놀라워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영주기자 yjch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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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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