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부주석의 광폭 외교가 눈부시다. 일본을 지나 지난 16일 밤 입국한 그는 17일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정운찬 국무총리, 경제 4단체장, 한나라당 및 민주당 관계자들을 두루 만난 뒤 18일 김해공항을 거쳐 후속 방문지인 미얀마ㆍ캄보디아를 향해 떠난다.
중국 내 공식서열은 6위지만 차기 주석직 승계가 확실해보이는 그의 이번 방한은 다른 어느 때보다 의미가 각별하다. 단기적으로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한 양국 간 협력 문제가 그렇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동아시아의 경제통합을 위한 물밑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 부주석은 아시아 4개국 순방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의 협력이 필요하다"며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가 제안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적극적인 지지를 나타냈다. 하토야마 정권은 과거 자민당 정권이 추구한 미국 중심의 외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타진하며 역내 영향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움직임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가 다극 체제로 바뀌면서 동북아시아 역학 구도에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 전조로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외교노선에는 여전히 불확실한 점이 많다. 일본과 중국이 맞장구친 '동아시아 공동체'구상에 대해 여전히 미국 눈치를 보느라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있고 북한 인권 문제는 거론하면서도 중국의 티베트ㆍ위구르 유혈사태, 파룬공 탄압사태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물론 이 같은 외교노선이 강대국 사이에서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겠지만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은 손상되기 마련이다.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제공했던 시장과 핵우산 아래에서 누렸던 지난 50년간의 '상대적 안정기'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 퇴조를 재빨리 눈치채고 새로운 공동체안으로 돌파구를 열어가려는 일본, 막대한 경제력과 위안화를 등에 업고 G2로 급부상한 중국의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동아시아 정치ㆍ경제 질서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구한말 이후 100년 만에 다시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해야 할 절체절명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