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9월 9일] 도덕자산의 축적

지난 198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인물난을 겪고 있던 민주당은 당시 명지사로 이름을 날리던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를 대통령후보로 밀었다. 여론조사를 봐도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사양했다. 이태리계 이민집안 출신인 코오모로서는 파고들면 먼 친척 가운데 불미스런 일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정치인으로 맞은 최고의 기회를 스스로 물리친 것이다. 반면 잘 나가던 페라리 상원의원은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남편은 탈세로, 아들은 마약 혐의로 구속돼 패가망신하는 수모를 겪었다. 일부 고위직의 치명적 잣대 '8ㆍ8개각'에 따른 10명의 각료 후보자 가운데 3명이나 자진 사퇴를 몰고온 국회 인사청문회 결과는 이제 우리도 이제 도덕성에 하자가 있으면 고위공직자가 되기 어렵게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덕 또는 도덕성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장식용이 아니라 치명적인 조건의 하나가 된 것이다. 자의적인 요소가 강하고 정략적으로 악용되는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피아제의 도덕적 발달단계론에서 말하는 제1수준, 다시 말해 선악의 개념은 있으나 권위적인 힘이나 자기의 욕구에 따라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의 적당주의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1990년대 초 고위공직자 재산등록제에 이어 2000년 국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후 짧은 기간 도덕성에 대한 국민의 눈높이가 크게 높아진 것을 반영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도 있지만 선진국일수록 국가 지도층은 높은 도덕성을 요구 받는다. 신뢰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이는 앞으로 고위공직자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평소 도덕자산을 쌓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명령이기도 하다. 돈이 행세하는 물신만능 풍조에다 오랫동안 투기경쟁ㆍ학력경쟁 등에 익숙해진 우리 풍토에서 도덕성이라는 단어는 어딘지 한가하고 거추장스러운 느낌을 준다. 높은 도덕성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풍조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취직을 위해 스펙을 쌓듯이 적어도 고위공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얼마간의 손해와 불편을 겪더라도 도덕자산의 축적을 위한 노력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동량지재로 기대를 모았던 인사들이 엄격한 도덕성의 잣대에 걸려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과연 형평성에 맞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국회청문회에 나가 도덕성과 능력 등에 대한 혹독한 검증을 받는 대상은 전체 국가 지도층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을 심사하고 호통치는 국회위원을 비롯해 자방자치단체장 등 막강한 권한과 지위를 누리는 지도층은 엄청나게 많다. 당연히 그들의 도덕성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상당수는 선거라는 절차를 거치거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왔다는 점에서 일정 수준은 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만 해도 여전히 제 식구 감싸는 방탄국회, 매사를 정략적으로 접근하고 쇠망치까지 등장하는 폭력국회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민을 위해 일하겠다며 표를 얻어 당선되고서는 호화청사, 전시용 사업, 먹고 놀자판 축제 등에 열을 올리고 국민세금을 탕진하는 일부 지자체장들의 후진적 행태와 무능이 위장전입이나 투기의혹보다 죄질이 가볍다고 하기 어렵다. 지도층 전반에 형평성이 중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이라는 물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도덕성이라는 정신적 자산도 축적돼야 한다. 그러자면 도덕이니, 도덕성이니 하는 단어들이 개각 청문회 때 잠시 반짝하다가 잊혀져서는 안 된다. 국가 전체 지도층을 포함해 우리 사회 전반에 도덕이라는 사회자산이 쌓일 수 있도록 의식개혁과 제도적 장치를 끊임없이 확충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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