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지만 가슴에 오래 남아 인생의 좌표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다. 스승이나 부모에게 들은 한마디 말이나 고전 및 성현의 책에서 접한 한 줄의 글이 그렇다.
내 인생에도 이런 깨달음을 주는 글이 있다. 고교 졸업식 날 담임선생님께서 칠판에 큰 글씨로 '붕정만리(鵬程萬里) 기불탁속(飢不啄粟)'이라는 글을 써놓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을 일깨우셨다. 이 글은 큰 새가 먼 길을 날아가는 도중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좁쌀은 쪼아먹지 않는다는 뜻으로 눈앞의 작은 이익을 좇지 말고 멀리 보면서 큰 길을 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평소에도 담임선생님은 인격 함양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고전과 한시를 많이 들려주신 덕분에 교양과 상식을 넓힐 수 있었다.
'춘향전'의 어사출또 장면에 등장하는 한시로 탐관오리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묘사한 "금동이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뭇 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맛 좋은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금준미주 천인혈 옥반가효 만성고·金樽美酒 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로 시작하는 문장을 지금까지 암송하는 것을 보면 선생님에게 받은 영향이 상당했던 것 같다.
책을 통해서도 우리는 인생의 스승을 만날 때가 많다. 물론 같은 글을 대해도 읽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심리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책을 통해 접한 글 한 줄이 인생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주변에서 쉽게 발견한다.
한마디 말이나 글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가. 이런 보편적인 사실에 대해 새삼 신비로움을 느끼던 차에 만난 책 한 권이 반가웠다.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는 짧지만 의미 있는 말이나 글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선물하는지 감명 깊게 보여주고 있다.
졸업식 날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내 인생의 등대가 됐다. 살다 보면 근시안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큰 방향을 잃을 수도 있고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편법에 마음이 끌릴 수도 있다.
자신의 부덕(不德)을 깨닫지 못한 채 남을 탓하기 쉽고 작은 공적을 다투느라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럴 때면 이 말씀을 떠올리면서 눈앞의 이익만을 좇지 않고 긴 호흡으로 당당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돌아보니 이런 가르침 덕분에 인생의 큰 방향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현재진행형으로 여전히 나를 이끌어주고 있다. 혹시 모르겠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한마디를 들은 다른 동창들의 인생에도 이정표가 돼주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