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S의 과거는 비록 짧지만 파란만장했다. PCS는 「CDMA냐, TDMA냐」의 기술논쟁부터 시작해 사업권 확보전, 광고전 등 굴곡많은 파노라마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지는 효과도 거뒀다.
◇사업권 획득 경쟁(~1996년6월)
PCS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면서 현대·삼성·대우·LG 등「빅4」를 포함한 대기업들이 사업자 선정에 대거 참여, 처절하고 드라마틱한 경합을 벌였다. 한국통신은 자동 케이스로 티켓 한장을 받았고 장비 제조군에서 LG가, 장비 비제조군에서 한솔이 각각 사업권을 거머쥐었다. 선정과정에서 이석채(李錫采) 당시 정통부장관이 「경제력집중 억제」를 명분으로 사업자수를 3개로 바꾼 점 등이 비리의혹을 불러일으켜 선정업체와 관계자들은 국정감사, 감사원 감사, 검찰 수사 등 무려 6차례에 걸친 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상용서비스 시기논쟁(97년6월~9월말)
PCS3사는 당초 사업계획서에 98년1월1일부터 상용서비스를 시작키로 했으나 LG텔레콤이 3개월이나 앞당긴 97년 10월1일부터 서비스에 들어갔다. 품질에 확신이 없었던 때라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상용서비스를 앞당긴 것이 IMF 직격탄을 피하며 가입자 확보에 큰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단말기 확보전쟁(97년10월~12월말)
PCS 3사의 조기 서비스 개시를 단말기 제조업체들이 미처 뒤따르지 못했다. 결국 극심한 단말기 품귀현상을 빚었다. 단말기 제조업체(LG정보통신)를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던 LG텔레콤이 단연 유리했다. 한국통신프리텔의 경우 예약가입자로 110만명이나 확보했으나 연말까지 실제로 단말기를 지급한 것은 30만대도 채 되지 못했다.
◇품질논쟁(97년10월~98년초)
PCS는 기존 셀룰러폰과 치열한 품질논쟁을 벌였다. 「한 단계 앞선 서비스」, 「주파수 대역만 다를 뿐 똑같은 서비스」라는 등 설전이 오갔고, 이는 광고전으로도 비화됐다. 「소리가 보인다」, 「원샷 018」, 「아빠래」 등 광고명작들은 그 부산물이다.
◇한솔PCS와 한통프리텔 통합망 구축 전격 합의(97년12월3일)
양사는 통합망 구축으로 오는 2001년까지 1조원 가량의 설비투자비를 줄일 수 있게 됐으며 과잉 중복투자 방지의 모범 사례로 주목받았다.
◇가입자 100만명 돌파(98년4월)
한통프리텔이 서비스 개시 불과 6개월여 만인 지난 4월23일 3사중 가장 먼저 가입자 100만명을 돌파했다. 1주뒤 말 LG텔레콤도 10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세계 이동통신업계의 신기록.
◇PCS 수사(98년4월~8월)
지난 4월7일 감사원이 특감에 착수하면서 한솔PCS와 LG텔레콤 경영진들이 조사를 받는 등 홍역을 치렀다. 급기야 지난 6월 정통부차관이 구속되기까지 이르렀다. 기나긴 감사·수사는 영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외자도입 협상에도 악영향을 끼쳤다.【백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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