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한국의 캐시카우 오늘과 내일] 1-4. 노조는 아직 `20세기(하)`-외국기업은 어떻게 극복했나

북미대륙 중심부 오대호 가운데 하나인 이리호(Lake Erie)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디트로이트. 미국 자동차 산업의 본고장인 이곳 시내중심부에서 이리호를 건너 캐나다로 넘어가는 `디트로이트-윈저 터널`의 바로 곁에 르네상스센터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GM본사가 엄청난 자부심을 드러내듯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자동차업체로 자부하는 이 회사도 한때 벼랑끝 위기에 몰린 적이 있다.불과 4년반 전인 98년 6월, 총 54일에 이르는 장기 파업이 그것이다. 당시 29개 공장중 27개가 조업을 중단하는 바람에 매출차질액만 22억달러에 달했다. 회사는 창사 75년만에 포드에 판매량 1위를 내주었고, 근로자들은 10억달러의 임금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로부터 4년여뒤. GM은 지난해 12월부터 올1월까지 캐나다 온타리오 소재 공장에서 일하던 1,800명을 해고했지만 어떤 갈등도 없었다. 미 자동차 노조를 이끌고 있는 전미자동차노조(UAW)도 무분규로 일관했다. 노사 양측이 98년의 파업을 끝내며 강한 생존 공감대를 이뤘기 때문이다. 이 공감대가 지금 GM을 세계 최대 기업으로 유지하는 힘이 되고 있다. ◇뛰어난 학습효과= 오늘날 세계 자동차시장의 `빅3`로 대변되는 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과거 67년에 이르는 노조 역사와 파업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사 상생의 형태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동차 노사는 3번의 큰 굴곡을 거쳤다. 빅3를 아우르는 UAW노조가 설립되던 1936년 당시만해도 총기난사 사건이 이어지는 등 노사가 서로를 철저히 부인했다. 1937년엔 3개월여의 대규모 파업끝에 사용자측이 노조를 인정했지만 정작 노사협상의 틀을 만든 것은 1948년의 파업을 겪고나서다. 당시 파업으로 임금협상은 물가상승률 등을 토대로 책정한다는 원칙이 구축됐다. 하지만 미 자동차노조가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또 다른 고비가 남아있었다. 양측은 48년 협상에서 `직무 규제(잡 컨트롤)협약`을 통해 노동강도가 심해지는 것을 막았다. 자연히 경영진은 노조의 눈치를 보게 됐고, 경직된 노사 관계 속에서 제대로 된 경영전략을 세우지 못했다. 결국 70년대 오일쇼크와 일본ㆍ독일 업체들의 미국 시장에 대한 대대적 공략의 와중에서 미국 자동차 업체들의 경쟁력은 곤두박질쳤고 급기야 79년 크라이슬러는 파산위기에 몰렸다. 기존 노사관계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고, 3년여의 협상끝에 회사 생존에 위기를 느낀 UAW는 임금과 근로조건 등을 대폭 양보했다. 이를 계기로 강성을 자랑하던 미국의 자동차 노조는 이후 실용주의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자동차공업협회 관계자는 “이는 우리 자동차 노사관계 모습과도 흡사한 측면이 많다”며 “기로에 선 우리 자동차 산업을 위해 노조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노조는 위기의식, 회사는 제도구축= 노사 대립 속에서 미국 노조가 배운 것중 가장 소중한 것은 유럽과 일본 등의 경쟁기업에게 시장을 내주고 공장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었다. 노조가 일방적으로 권익을 추구할 경우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독약(해고)`뿐이라는 인식이 자리한 것이다. 특히 80년대 파업을 통해 미국은 뿌리깊었던 포드식 대량생산 방식 대신 새로운 일본식 경영실험을 시작했고, 노조에선 고용안정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대한 인식이 싹을 틔웠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GM 플래몬드의 누미(NUMMI) 공장도 80년대 중반 생산성 하락으로 폐쇄됐으나 GM이 도요타를 합작 파트너로 삼으면서 새로 태어난 곳이다. 회사도 노사협력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고용조정에 대비해 적극적으로 전직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연금도 늘렸다. 임금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아도 노조에 대한 지원은 이어졌다. 파국을 막기 위해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파업 예방대책`인 셈이다. 노조는 전략적 투자 등 회사 정책에 의견을 개진하고, 회사는 최대한 이를 존중한다. 노동연구원 관계자는 “우리는 1년에 3~4개월씩 아무것도 못하고 노사협상에 매달린다”며 “제도적 개선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협상에 임할 경우 매년 파업을 되풀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법 테두리는 지키고, 정부는 개입을 자제한다= 98년 GM 파업당시. 협상의 주체인 UAW는 파업중에도 생산업무는 절대 방해하지 않았다. 노조원들의 분규는 철저하게 공장 밖에서 이뤄졌다. 노조원들이 비노조 근로자들의 회사 진입을 막는 행위도 없었다. 파업때면 으레 공장이 점거되고 생산라인이 올스톱되는 우리로선 부럽기 짝이 없는 얘기다. 미국의 노사문화 성숙에는 정부도 한 몫했다. 자동차산업연구소 관계자는 “3년동안 지속된 크라이슬러의 노사협상을 제외하고는 미국 정부가 나선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는 자동차 파업이 이뤄지면 예외 없이 정부가 나선다. 98년 현대차 파업당시에는 집권여당까지 나서 중재단을 내려 보냈다. 이렇게 되면 사측의 영역은 좁아들고 노사협상의 원칙은 송두리째 날라간다. 노조로선 “불법도 버티면 승리할 수 있다”는 인식에 빠지기 십상이다. 주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위법 행위가 있을 때는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되 나머지는 노사간의 자율적 협상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의 자동차 노사문화] 노동시장 유연성 정착 BMW, 17년 無파업 노사화합의 대표적 모델로 꼽히는 유럽의 자동차 노사 문화의 바탕에는 영국의 경험이 타산지석으로 깔려있다. 한때 노조가 연이어 파업과 공장 폐쇄 등 강경투쟁을 벌였던 영국의 롤스로이스ㆍ로버ㆍ재규어 등은 이제는 모두 외국 회사가 됐다. BMW와 폴크스바겐 등 내로라하는 자동차 기업을 거느린 독일. `노동자들의 천국`이라는 독일이지만 이 곳에서 파업 행위를 찾기란 쉽지 않다. 국가 전체적으로 지난 91년부터 10년동안 파업으로 인한 총 근로 손실일수는 11일에 불과했다. 하이케 뮐러 BMW 인사담당 그룹장은 가장 큰 요인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꼽았다. BMW는 이른바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정착된 대표적 업체다. 한쪽에선 재고가 쌓이고, 다른쪽에선 주문이 아무리 밀려도 라인별 대체근로가 용납되지 않는 국내 자동차 업체의 현실과는 딴판이다. BMW는 덕분에 40년 이상의 연속 흑자와 17년 무(無)파업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회사측은 지난해 전 직원에 독일 금속노조가 정한 성과급(60%)의 두 배인 120%를 지급했다. 세계 4위의 생산업체인 폴크스바겐. 이 회사 노조는 지난 지난 2001년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5,000명을 추가 채용하는 회사측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실업을 최소화하면서 노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 단적인 사례다.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은 “유럽의 자동차 노조는 고용보장보다는 사회 전체의 고용확대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은 볼보나 르노 등 세계적 자동차 업체를 갖고 있는 스웨덴ㆍ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유럽의 노조가 세계 어느 곳보다 강하지만 불법을 통해 이익을 관철하는 일은 거의 없다”며 “제도적 틀 안에서 파업은 결국 노동자도 손해라는 인식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노사 공동의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감사위원회`시스템, 실업을 최소화하기 위해 흔쾌히 예산보조에 나서는 정부 등 `노사정 협력모델`도 유럽 노사문화에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도요타車, 11조 흑자내고도 경쟁력 강화위해 임금동결 지난 2월 열린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임금 협상은 우리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비상식적(?)이었다. 경영진과 노조가 마치 각본에 맞춘 양 쉽게 임금 동결에 합의한 것이다. 어찌 보면 노조가 먼저 나서서 임금 동결을 선언한 것이나 진배 없었다. 노조는 대신 고용안정을 요구했다. 2002년 회계연도에 11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흑자를 냈지만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사 모두 자기 몫 챙기기를 최대한 자제하는 현실, 도요타의 경쟁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도요타는 임금 동결 대신 당해 연도 흑자액의 일정부분을 특별 성과급으로 직원들에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성과급은 흑자액의 7%에도 채 못미친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순익의 30%`라는 엄청난 규모의 성과급을 요구하는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노조의 운영행태도 우리와는 딴판이다. 이른바 `귀족노조`로 표현되는 특권의식을 도요타 노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상근 노조원(843명당 1명)은 우리의 절반이고, 모든 운영은 노조비로 충당한다. 노조는 경영에는 일체 간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1년에 4번씩 회사경영진이 직접 노조와 공개토론을 하는 노사 협의회를 갖는다. 노조는 여기서 밝히는 회사측의 자료를 완전히 신뢰한다. 도요타 노사의 `상생 정신`은 지난 1940~60년대 뼈아픈 대립의 시절에서 얻은 교훈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노동운동인 `춘투(春鬪)`도 1955년에 생겨난 것. 이를 통해 일본 노사는 극한 대립이 모두에게 손실을 입힌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다. 노사는 이후부터 `대화로 시작해서 대화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다. 노무 담당자는 1년중 3분의2 가까이를 노조관계자와 식사한다. 50년이 넘는 노조의 무쟁의는 바로 상생 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회사측도 아직까지 종신고용제를 유지하면서 `해고없는 회사`를 지향하고 있다. 정부도 노사간의 대화 문화 착근에 적극적이다. 기업ㆍ노조와 함께 3자간 대화를 하는 `산업노동간담회`를 열어 노ㆍ사ㆍ정간 대화에 나서고 있다. 노ㆍ사ㆍ정 3자가 대화를 통해 상생의 모습을 찾는 모습, 도요타 노사문화가 가진 경쟁력의 뿌리다. <김영기기자 you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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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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