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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TV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됐다. 독특한 설정과 함께 무지개 같은 7개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 배우의 연기는 단연 화제였다. 얼굴에 찍은 점 하나로 새 인격을 만들 수 없다는 건 배우도 관객도 다 아는 세상. 몸짓과 말투, 감성까지 싹 바꾼 '일인다(多)역'은 그래서 더 깊은 내공이 필요하다. NG도, 컷도 없는 무대 공연은 더더욱.
연기 예술에서 일인다역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번성기에 꽃을 피운 비극은 배우 한 명이 모든 배역을 담당하는 1인극에서 출발했다. 사실 이 유일한 배우는 전문 연기자라기보다는 '코러스'라고 불리는 해설자에 가까웠다. 이후 그리스 비극 3대 시인인 아에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배우를 각각 2·3·4명으로 늘려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배우의 다역 부담이 줄고 드라마는 더욱 정교해졌다.
최근 공연되는 일인다역 작품은 새로운 시도로서 의도된 선택인 경우가 많다. 국내 초연 중인 뮤지컬 '쿠거'엔 멀티맨이 등장한다. 중년 여성 세 명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대담하게 그려낸 이 작품에선 남자배우 한 명이 잘 생긴 바텐더와 네일샵 주인, 만남 상대 등 6개 역을 소화한다. 관객은 '어떤 배우가 등장할지'는 알고 있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기대하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조연이 아닌 주연배우 전원이 일인다역을 하는 작품도 있다. 지난 2일 개막한 연극 '스피킹 인 텅스'는 배우 4명이 1인 2·3역을 하며 9개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색다른 자극을 원하는 두 쌍의 부부, 늘 자유로운 사랑을 원하는 여자, 사랑에 집착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남자…. 각 캐릭터는 교묘하게 연결돼 복잡한 인물도를 만들어 내는데, 배우들은 다른 상황 속의 전혀 새로운 인물로 변신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일인다역의 최고봉은 1인극인 모노드라마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는 배우 한 명이 여장남자, 게이작가 등 총 35개의 인물로 변신한다. 지난해 재연 당시 주인공 지현준은 공연 후 주요 캐릭터를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 '원맨쇼 커튼콜'을 선사해 관객에게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김성녀의 대표작 '벽 속의 요정' 역시 배우 한 명이 5세 아이부터 사춘기 소녀, 엄마 등 32개 캐릭터를 표현하는 연극으로 유명하다.
작품을 갓 끝낸 배우들에게서 '배역에 깊게 빠져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곤 한다. 배역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하는 배우에겐 숙명 같은 고통이다. 한 명도 힘든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2명이나 3명, 심지어 30명까지 불러내는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면 2인분 이상의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