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기술의 심장이자 자존심으로 불리는 충남 대덕특구. 지난 6월29일 찾은 이곳에서는 한때 명성을 날리던 초일류 두뇌와 첨단기술이 갈수록 빛이 바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국책연구원에서 근무하는 L박사는 “외환위기 이후 연구원들의 처우는 일반 봉급쟁이들보다도 못하다”면서 “만약 월급을 2배 주는 곳이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를 옮기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틀에 걸쳐 만나본 대덕의 고급두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체로 자조와 한탄을 늘어놓으며 하나둘씩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들의 좌절과 절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연구원들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난 96년 도입된 PBS(Project Based System)를 꼽았다. PBS는 연구원들이 직접 정부나 기업이 출연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해 인건비ㆍ연구비용 등을 충당하는 제도다. 프로젝트를 수주하느냐 못하느냐에 연구원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것이다.
정환성 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프로젝트 수주에 생계가 달려 있다 보니 책임연구원급 이상의 연구원들은 프로젝트를 따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전했다. 배종욱 한국화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역시 “단기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프로젝트 수주에 매달리다 보니 연구다운 연구를 하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주택이나 의료서비스 등 사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도 연구원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참여정부가 행정수도 이전을 발표하면서 대전 인근의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라 부담이 커졌지만 연구원들을 위한 주택마련대출제도는 오히려 축소됐다고 한다. 손광재 한국원자력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연구원들을 위한 주택마련대출제도를 알아보니 최고 1,500만원밖에 대출받을 수 없고 이자는 연 8%나 되더라”며 “이곳에 오고 싶어도 집을 마련하기가 힘들어 오지 못하는 동료들도 많다”고 전했다. 그나마 1곳의 공공아파트마저 30년이 지난데다 입주가구도 174가구에 불과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부족한 의료서비스도 연구원들을 좌절하게 한다. 대덕의 병원 밀도는 전국에서도 상위권에 들 정도로 많지만 문제는 의료서비스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가족이나 친척의 병 수발을 들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돌고 있을 정도다.
이 같은 열악한 연구환경은 결국 연구원들의 ‘대덕 엑소더스’로 이어지고 있다. 각 연구원마다 매년 10~20명가량의 연구원들이 대덕을 떠나고 있는 것.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매년 10~20여명의 동료들이 기업이나 대학 혹은 해외 연구소로 떠나고 있다”면서 “떠나는 동료들을 볼 때면 가슴이 쓰려온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 연구원은 “대덕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동료는 단 한명도 없다”며 “대덕이 보다 매력적인 연구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베테랑 과학자들은 대덕을 떠나지만 새로 수혈되는 ‘젊은 피’는 터무니없이 적어 연구인력의 노쇠화 속도도 가파르다. 10~20년 후 기존 연구원들이 대거 퇴직할 때 심각한 연구공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시급한 개선이 필요하다.
이종민 한국원자력연구원 홍보팀 행정원은 “부족한 예산 때문에 연구원 채용이 부진하다 보니 대덕특구 내 국책연구원들의 평균연령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며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중하지 말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수인력을 유치하고 육성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화학 관련 대기업에 근무하다 최근 국책연구원인 한국화학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배종욱 선임연구원은 “연구원들에 대한 지원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며 “선택과 집중을 통해 예산을 분배하고 과학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