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7일] 조르게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소련판 제임스 본드’. 일본에서 활동한 소련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에게 붙는 수식어다. ‘가장 빛나는 첩보원’라는 맥아더 장군의 평가도 있다. 1895년 독일인 석유기사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그의 어린 시절은 독일 애국주의자. 1차대전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철십자훈장도 받았다. 변신계기는 부상.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로부터 공산주의를 접했다. 의병제대하고 베를린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신문기자로 일하며 소련을 제발로찾아가 간첩교육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 차이퉁지 상하이특파원으로 부임(1930년)한 그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익히고 아시아 농업사를 탐구하며 인맥을 쌓아나갔다. 소련이 도쿄로 보낸 조르게는 독일인 사회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일본 문화에 대한 심층기사로 일본 권력층의 환심도 얻었다. 독일대사관 무관 출신인 오토 대사는 핵심 군사정보를 스스럼없이 나눴다. 조르게가 보낸 독일군의 소련침공 첩보를 스탈린은 묵살했지만‘일본군이 보르네오산 석유 확보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시베리아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보고는 2차 대전의 흐름을 갈랐다. 소련이 안심하고 시베리아에 배치된 75만병력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투입하고 유전지대를 지켜낸 것도 조르게 덕분이다.‘관동군이 남방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1941년 10월 조르게가 체포됐을때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정권이 바뀌었을 정도다. 공작금도 없이 일했던 조르게는 소련에 버림받았다. 소련은 그의 존재를 부인하며 일본의 석방교섭에도 응하지 않았다. 소련이 조르게의 공적을 인정한것은 1964년, 조르게가 교수형에 처해진 1944년 11월7일로부터 20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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