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살리려 '화폐 힘빼기' 경쟁대(對)테러전 외 세계는 지금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무대는 외환시장. 바로 환율 전쟁이다.
미국ㆍ일본 등 선진국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이머징 마켓국가까지 나서 다른 나라 환율정책이 세계 경제침체의 원인이라며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이 같은 비난전에서 각국이 추구하는 것은 자국화폐 가치의 하락. '강한 화폐는 강한 국력이 아니라 약한 경쟁력'이라는 생각이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환율전쟁이 내년 확전으로 치달을지 아니면 진정국면으로 들어설지는 미 행정부의 새 경제팀이 어떤 환율정책을 선택할 것인가가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수출업체의 손을 들어 약(弱)달러 정책을 펴면 확전이 불가피하지만, 월가의 기대대로 강(强)달러 정책으로 전환하면 진정국면으로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김대환기자<경제학박사>dkim@sed.co.kr
▦'자국의 경제침체는 타국의 환율정책 탓'
일본의 시오카와 마사주로 재무장관은이 달 초 "달러화의 적정 가치는 150엔에서 160엔 사이"라고 언급하며 지나치게 저평가된 달러화가 일본 경제회복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시오카와 장관은 달러화 가치가 120엔 대에 머물면서 일본의 수출기업이 미국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의 수요 부족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펴온 미국은 달러화가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다는 일본 정부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또 올 상반기 아시아 각국이 추진한 700억 달러 규모의 외환시장 개입이 의도한 효과 없이 환차손만 만들어 냈다고 비난하고 있다.
환율 논쟁이 미ㆍ일 간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달러화에 대한 고정환율을 유지하며 세계 시장에 저가품을 토해내고 있는 중국에 대한 각국의 비난도 증가하고 있다.
일본 재무성의 구로다 하루히꼬 차관과 가와이 마사히로 차관보는 이 달 초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세계적 디플레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중국은 위앤화 가치를 절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중국은 "위앤화 가치는 시장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중국은 환율이 시장에서 결정되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제 자본이동에 대한 직접 규제를 통해 환율을 통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에 대한 각국의 평가절상 요구가 지속되는 것이다.
▦자국화폐 가치하락 추구
최근의 환율전쟁에서 각국이 추구하는 것은 자국 화폐가치의 하락이다.
화폐가치 하락이 언제나 환율정책의 목표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강한 화폐는 강한 국력을 상징한다'는 생각으로 화폐가치 방어를 중요시 여기던 때도 있었다.
80년대 영국의 마가렛 대처 정부는 강한 파운드화는 영국의 자존심이라고 믿고 파운드화의 가치를 방어하는데 정책수단을 집중시켰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1 달러 밑으로 떨어졌을 때는 미국인들이 세계 유일의 '수퍼 파워'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며 기뻐했다.
올해 유로화 가치가 상승, 1달러를 넘어서자 일부 유럽 언론은 유럽의 경제력이 인정 받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 같은 높은 화폐가치에 대한 선호가 국민 정서만을 바탕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경제가 안정되면 해외로부터 투자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고 화폐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따라서 높은 화폐가치는 안정된 경제를 상징한다.
또 화폐 가치가 상승하면 화폐의 구매력이 높아지므로 국내 자산의 가치도 상승, 국부를 창출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강한 화폐가 강한 국력'이라는 생각은 80년대 이후 빠른 속도로 사라져 왔다. 대신 '약한 화폐가 강한 경쟁력'이라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국가간 무역이 증가하면서 경제 규모가 크든 작든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이 중요한 정책 목표가 돼 온 게 주요인이다.
화폐가치가 하락할 때 나타나는 바람직한 요인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화폐가치가 하락하면 국내 자산 가치와 인건비도 하락하기 때문에 외국인의 직접투자가 증가한다.
직접 투자 증가는 신규 고용을 창출, 실업률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또 최근처럼 디플레에 대한 우려가 높은 상황에서는 화폐가치 하락의 인플레 유발 효과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수입품의 가격이 상승해서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새 달러정책이 향후 환율전쟁의 관건
화폐 가치 하락을 추구하는 각국 정부의 이해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최근의 환율전쟁이 내년에는 진정 기미를 보일지는 미 행정부의 새로운 경제팀이 채택하게 될 달러화 정책에 달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이 달 초 달러가치 방어에 소극적이라는 평을 받아 온 폴 오닐 재무장관을 사실상 해임했다.
오닐 전 장관이 월가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판단 아래, 오닐의 후임으로는 부시의 감세정책을 월가에 효과적으로 '세일즈'할 수 인물인 존 스노 CSX회장이 임명됐다.
이에 따라 증시 부양을 위해 강(强)달러가 필요하다는 월가의 요구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예상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이 실제로 강달러 정책을 추진할 경우 자국 화폐가치 하락을 추구하는 다른 국가들의 이해와 부합, 환율전쟁은 진정 국면으로 들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시나리오도 만만치 않다. 미국이 부족한 내수를 해외 수요창출로 해결하기 위해 약달러를 보다 강력히 추진해나간다는 견해다.
약달러에 직접적 수혜를 입게 되는 수출기업 뿐 아니라 일본 등지로부터의 수입품과 경쟁하는 내수업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시 행정부가 달러가치 하락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환율전쟁은 내년에 오히려 더욱 격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