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11.도서출판 예림당의 탄생

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공군에 지원 입대할 때, 무작정 상경한 것도 그랬으며 결혼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옳다고 생각하면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이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살아가는 길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주변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출판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눈길을 보냈는데도 흔들리지 않고 밀고 나간 것도 따지고 보면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끝까지 하고 마는 나의 성격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인지도 모른다. 처음 출판한 책은 어린이 그림책과 색칠하기 등 4권이었는데 이 과정역시 자료수집은 물론 제목과 내용은 나 혼자 결정했다. 유아용 책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 몇 사람을 만났지만 그림 값을 너무 많이 달라고 해 도저히 맡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 소개로 대구에 살고 있는 그의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을 찾아갔다. 당시 그분은 정년퇴임을 했는데 다행히 의도를 얘기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림을 그릴 내용과 자료를 주고 서울로 왔는데 열흘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다시 대구로 내려갔더니 “그림책의 그림은 그려본 적이 없어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난감해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일러스트인데 당시만 해도 사진 등 확실한 자료 없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해 개념이 서지않는 시대였다. 이리저리 방법을 찾다가 할 수 없이 서울로 모셔와 신촌 여관에 묵게 하면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책 표지는 MBC 미술부에 근무했던 고등학교 동문 강웅부씨, 본문은 친구인 오대성이 맡았다. 책 제목은 서툰 솜씨지만 밤을 세워가며 내가 직접 글자 도안작업을 했다. 그 해 7월 아내는 둘째 아이 도연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입원을 했다. 결국 도연이는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 태어났는데, 산모와 아기가 건강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수술비로 출판자금의 일부를 사용하고 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사실 적금 30만원도 계획한 책을 내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일부 자금에 불과했다. 결국 고향으로 내려가 변통을 하고, 가깝게 지냈던 지방의 몇몇 서점주를 찾아가 먼저 어음을 끊어달라고 부탁했다. 어음을 부탁하면서 책이 나오는 대로 바로 보내주겠다고 말했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서점에서는 책을 판매한 후에도 대금은 어음을 끊어주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나의 부탁은 대단히 무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점주들은 “인간적으로 믿는다”며 선뜻 어음을 끊어줬다. 부산의 중앙, 대구의 문화, 삼신, 울산의 태화서점 등 열 곳이 넘는 서점에서 받은 어음 47만원과 고향에서 빌린 34만원, 적금 30만원을 포함해 출판자금은 모두 111만원이 됐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모양이다. 뜻하지 않게 몇 차례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원유가격은 삽시간에 26배나 뛰었다. 국가경제는 비상이 걸렸고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종이 값은 물론, 제판ㆍ인쇄ㆍ제본 비용이 엄청나게 올라 출판여건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 때 미리 생각해뒀던 `예림당`을 출판사 이름으로 정해 등록서류를 준비했는데 또 다른 난관에 부딪쳤다. 출판사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사무실과 전화가 있어야 하는데 제작비도 모자라는 마당에 별도의 사무실을 내고 전화까지 설치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처럼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출판에 뜻을 두고 있던 마포 학문당 서점 강대곤씨의 배려로 서점 사무실과 전화번호로 출판사 등록을 할 수 있었다. 1973년 11월5일 드디어 도서출판 예림당으로 등록증을 받았다. 나와 같은 날 도서출판 학문당으로 등록한 강대곤씨는 기술서적 전문 출판사로 키워 입지를 탄탄하게 굳혔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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