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홈플러스 본사가 있는 서울 역삼동 삼정개발빌딩. 사무실을 분주히 오가는 홈플러스 직원들의 표정에 하나같이 긴장감이 묻어났다. 지난 6월 임직원들이 모여 월드컵 경기를 단체로 응원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연이은 실적 부진에 직원의 경품 조작과 노조 파업이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전대미문의 위기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한 직원은 "입사 이래 요즘처럼 어수선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며 "전에는 국내 2위 대형마트라는 자부심이라도 있었지만 정작 경영진에선 별다른 위기 의식이 보이지 않아 직원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도성환 사장이 이끄는 홈플러스호가 위기감에 휩싸였다. 지난달 홈플러스의 산증인인 이승한 회장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데다 한국 홈플러스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본사 테스코의 필립 클라크 회장도 경질된 상태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악재가 연이어 터지면서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마치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위태로운 배 같은 모습이다.
무엇보다 실적 부진이 가장 큰 문제다. 홈플러스의 올 상반기 매출은 전년보다 4.1% 감소했다. 경기침체와 세월호 참사에 따른 소비 위축을 감안해도 기대 이하의 성적표다. 같은 기간 이마트(139480)는 0.6% 줄었고 롯데마트는 2.9% 하락했다.
지난해 홈플러스그룹의 영업이익률은 3개 계열사를 포함해 3.25%. 2011년 5.8%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주력인 홈플러스의 영업이익률도 6.1%에서 3.4%로 반토막났다. 홈플러스는 24시간 영업하는 점포가 많아 상대적으로 타격이 컸다는 입장이지만 경영 전반에 허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 7월에는 직원이 경품 추첨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고객의 개인정보가 보험사와 카드사에 넘겨진 것도 알려져 신뢰도는 다시한번 추락했다. 도 사장이 직접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홈플러스는 일부 직원의 일탈 행위로만 규정해 '꼬리 자르기'라는 논란이 일었다.
최근에는 노조 파업의 내홍까지 겪고 있다. 계산직과 판매직 사원의 임금 인상을 놓고 노사가 입장을 좁히지 못하면서 홈플러스 노조는 부분 파업에 이어 전면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도 사장은 노조의 요구에 강경 자세로 일관하고 있어 양측의 갈등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여기에 동반성장위원회가 발표하는 동반성장지수에서 홈플러스가 3년 연속 최하 등급을 받았다는 점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업계에서는 연매출 10조원에 재계 순위 35위로 성장한 홈플러스가 '실적·고객·노사'라는 3대 악재에 내몰린 원인으로 도 사장의 리더십 부재를 꼽는다. 도 사장은 취임 1주년을 맞은 지난 5월 기자간담회를 여는 대신 부장급 이상 임직원을 회사 강당에 불렀다. 하지만 정작 3분가량 인사말만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승한 회장에게 할애해 주객이 전도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10월에는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열린 연설에서 "향후 10년 간 대형마트와 편의점 등을 포함해 5,000개의 매장을 국내에 열겠다"고 밝혀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에 대한 문제 의식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회장의 공백을 메우려면 경영 전략을 구상하는 것 못지 않게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만 지나치게 공개 석상에 나서는 것을 꺼린다는 점도 약점으로 꼽힌다.
영국 본사인 테스코가 최근 실적 부진을 이유로 한국 홈플러스에 우호적인 필립 클라크 회장을 경질한 것도 도 사장에게는 부담이다. 유니레버 출신인 신임 데이브 루이스 최고경영자는 구조조정과 경영효율의 전문가다. 테스코 해외법인 중 선두를 달리는 홈플러스의 위기에 칼을 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도 사장이 취임 후 1년이 넘도록 별다른 성과 없이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면서 내부 임직원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며 "다음달 취임하는 신임 테스코 CEO가 방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때까지도 실적 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도 사장의 입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