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가도 볼 영화가 없다고? 늘 가까운 멀티플렉스 극장만 찾아다닌다면 이런 투덜거림 밖에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많고 지금도 어딘가에선 좋은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잘 모르고 또 극장이 좀 멀고 불편할 뿐. 지금도 서울 시내 예술영화 전용관에선 놓치기 아까운 영화들이 속속 상영되고 있다. 현재 단관 개봉 중인 영화 다섯편을 한꺼번에 소개한다. 조금만 발품을 팔아서 극장을 찾아 영화의 향기에 막 시작되는 겨울을 맞이해 보는 건 어떨까. ■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기묘한 소통 '방문자'
감독: 신동일 / 출연: 김재록, 강지환 이혼당하고 실직까지 한 남자. 무기력하게 세상을 조소하고 심술만 부리며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도통 삶에 낙이 없다. 그러다가 그의 삶에 우연히 한 '방문자'가 뛰어든다. 그의 집에 전도를 하러 온 신앙심 가득한 바른생활 청년 계상. 우연히 계상이 호준의 생명을 구해준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기묘한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영화 '방문자'는 이렇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소통을 통해 서로 발전해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올해 시애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며 베를린 영화제에도 진출해 호평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루한 예술영화는 절대 아니다. 그 자신 한명의 지식인이기도 했던 신동일 감독은 호준의 일상과 그의 비루함을 솔직하고 위트있게 고백한다. 유머를 통한 자기 성찰. 해외 언론이 그를 '한국의 우디 앨런'이라고 부를 만 하다. 방문자라는 의미있는 제목을 통해 삶의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감독의 시선이 묵직하다. 호준의 불평불만과 계상의 입바른 소리 속에 드러나는 감독의 사회적 성찰과 상상력을 엿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방문자'는 마치 몸에 좋은 영양식처럼 유머와 성찰이 균형있게 자리 잡혀 있다. 서울 광화문 시네큐브. ■ 삶의 여정에서 찾는 화해와 용서 '길'
감독: 배창호 / 출연: 배창호, 강기화 왕년의 스타감독에서 어느새 소리없이 강한 예술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배창호 감독의 신작. ‘길’이라는 제목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영화는 한 떠돌이 사내의 길고 긴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죽마고우 친구와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한 후 떠돌이의 삶을 선택한 태석. 감독은 20년 동안 각지의 장터를 떠돌며 살아 온 대장장이 태석의 인생길을 직접 연기까지 하면서 보여주고 관객들에게 그 애절함을 호소한다. 언뜻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가 떠오르는 오래되고 익숙한 이야기다. 하지만 감독은 영상을 통해 스토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것은 바로 영화 속 가득한 나그네의 정서. 나그네는 한걸음 한걸음 땅을 밟아감으로써 지나온 삶의 괘적을 반추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을 용서한다. 그렇게 영화는 ‘길’을 통해 치유와 용서를 이야기한다. 한때 최고의 흥행 보증 수표였던 배창호 감독이 5억원이라는 적은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 수 밖에 없는 현실, 게다가 그마저도 2년 만에 개봉한 현실이 가슴 아프다. 하지만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반갑다. 서울 종로 스폰지하우스 상영중. ■ 자본주의 세계에서 겉도는 청춘의 모습 '세계'
감독:지아장커 / 출연: 자오타오, 첸타이셍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스틸라이프’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지아장커의 2004년작 영화. 뉴욕 자유의 여신상, 파리 에펠탑, 이집트 피라미드 등 세계 각지의 명소를 한 곳에 모아 놓은 테마파크 ‘세계공원’을 배경으로 성공을 꿈꾸고 상경했지만 비루한 삶을 살 뿐인 두 연인의 모습을 그렸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고향에서 베이징까지 올라왔지만 집을 구할 돈마저도 없는 세계공원 무희 타오와 경비원 타이셍의 보장되지 않은 미래는 지금 세계화의 최첨단에 서있는 중국 젊은이들이 느끼는 불안감 그대로다. 감독은 ‘세계공원’이라는 집약된 장소를 배경으로 화려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겉도는 젊은 청춘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지아장커는 세계화의 바람에 휩쓸려 액션 영화들을 양산하고 있는 장이모, 첸카이거 등 과거 거장들과는 달리 꼿꼿하게 예술영화의 길만을 달려온 인물. 하지만 ‘소무’, ‘플랫폼’등에서 거친 질감의 화면을 보여줬던 것과는 달리 ‘세계’는 달리 화려한 볼거리도 많은 영화다. 테마파크를 배경으로 화려한 색감과 사운드가 펼쳐지고, 중간중간 삽입돼 인물들이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도 인상적이다. 서울 종로 필름포럼 상영중. ■ 이념을 뛰어넘는 가치 '가족'
'디어 평양' / 감독: 양영희 재일 조선인 2세인 감독이 조총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북한에 사는 세 오빠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 다큐멘터리로 찍었다. 15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평생 북한을 ‘조국’이라 불렀던 아버지. 북한의 귀환정책에 따라 아들 셋을 모두 북한에 돌려 보낸 사람. 세상이 변했는데 아직도 ‘수령님’과 ‘장군님’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는 그런 아버지를 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떠나보낸 아들들을 그리워 하며 아들들의 고단한 삶을 뒤에서 묵묵히 보살펴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또 세월의 풍파에 휩쓸려 그런 신념마저도 점점 무뎌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딸은 서서히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북한 핵실험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이 때 생뚱맞게 개봉하는 ‘디어 평양’. 하지만 분명 영화 속 그들의 삶은 핵과는 별개 문제다. 영화는 ‘이념’이라는 복잡한 문제 대신 ‘가족’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통해 다른 이념을 가진 가족초월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화해를 하고 애정을 쌓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영화는 그렇게 가족을 통해 다른 이념을 가진 두 세계를 화해시키려 한다. 서울 명동 CQN 상영중. ■ 판타지적 이미지와 '모성'의 아름다운 조화 '귀향'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 출연 :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등 끊임없이 모성의 신성함과 여성 자궁의 아름다움을 찬미해온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귀향’에서도 그는 여전히 남자들을 배제한 여성들만의 삶을 예찬하고 축복해 준다. 무능력한 남편 밑에서 억척스럽게 살다가 우여곡절끝에 남편을 살해하고 만 라이문다. 그녀의 동생 솔레와 사춘기 딸 파울라. 그리고 그들을 맴돌며 애절한 시선을 보내는 죽은 엄마의 유령. 영화는 3대에 걸쳐 ‘지지리도 남자복 없는’ 여자들이 모여 모정과 연대감을 확인해가는 영화다. 모성을 통해 인간본성의 안식처를 찾아보고자 하는 알모도바르의 여정은 이렇게 ‘귀향’에서도 계속된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답게 영화는 원색적인 이미지와 환상적인 스토리, 그리고 기묘한 유머가 가득하다. 독특함을 즐기는 영화팬들에게는 그만한 성찬이 없다. 빛나는 여배우들의 연기도 볼거리. 라이문다를 연기하며 유난히 아름다워보이는 페넬로페 크루즈 뿐 아니라 등장하는 여배우들 하나하나의 연기가 빛난다. 이들의 연기에 대해 올해 칸영화제는 출연여배우 다섯명에게 공동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서울 종로 스폰지 하우스 상영중.